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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폭력과 희생: 성경과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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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23 ㅣ No.917

[경향 돋보기 - 폭력과 희생] 성경과 폭력


폭력적인 하느님?

폭력은 성경, 특히 구약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주제다. 구약성경에서 일이나 사랑 또는 성이나 교육 등 어떤 주제도 폭력행위처럼 자주 그리고 극적으로 묘사된 것은 없다. 약 600군데에 걸쳐서 어떻게 한 개인이나 왕이, 또는 한 민족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여 죽였는지가 서술되어 있다. 인간만이 아니라 하느님도 폭력적이고 피를 요구하는 잔인한 분으로 묘사된 구절도 적지 않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여호 10,40) 숨쉬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모조리 죽여버렸다. 또한 에제키엘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전한 대목에서는 하느님 자신이 폭력과 살육을 부추긴다. “칼이다! 잘 갈아 날이 선 칼이다. 마구 죽이라고 간 칼이요 (…) 그것은 살해자의 손에 넘기려고 잘 간 칼이요 날을 세운 칼이다”(에제 21,14-16).

역사서와 예언서의 대략 1,000개의 구절들에서 하느님은 죽이고, 복수를 요구하며, 불을 뿜어대듯 분노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성경 구절들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온갖 종류의 잔인성들, 이를테면 무력을 사용한 신앙 전파, 십자군운동, 종교재판, 종교전쟁 등을 정당화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하느님의 모습을 이스라엘을 위한 전사(戰士)로 부각시키는 여호수아기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말살이나 남아프리카에서 백인 집단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폭력을 써서 신앙을 옹호하거나 전파하는 것을 분명하게 반대한다. 폭력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폭력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서 가톨릭 교의신학자 라이문트 슈바거 신부는 1978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희생양은 필요한가?」(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9년)에서 주목할 만한 해석을 내놓았다.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폭력성은 그분의 본래적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폭력성이 무의식적으로 하느님께 투사된 것이다.’ 이 해석의 배경에는 프랑스 태생의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 교수의 이론이 자리한다.


인간의 폭력적 성향

지라르는 1972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 1997년)에서 독특한 인간 이해를 제시한다. 그는 그리스 비극 작품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저작과 같은 주요 세계문학 작품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성보다는 격정적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인간의 근본적 욕망은 생래적으로 어떤 고유한 목표를 지니고 있지 않고, 모방을 통해 그 목표가 정해진다. 곧 인간은 자신이 본보기로 삼는 사람(모델)이 갈망하는 것, 이를테면 한 여인, 하나의 왕국, 사회적 지위 또는 금전 등을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두 사람이 동일한 대상을 갈망하게 되면, 거의 불가피하게 경쟁이 발생한다. 욕망의 대상을 정하는 데 모델이 된 사람이 어느 순간에 방해자, 적수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모델이 자신의 경쟁자에게 거부 반응을 내보이면, 모방하는 사람은 다시 모델의 이 거부 반응을 닮게 된다.

모방과 그것에서 기인한 경쟁이 계속 고조되면 급기야는 서로가 목표로 하던 대상이 쉽게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그 이후에는 오로지 상대편을 제압하는 것이 관심의 전부가 된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동물과는 달리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태생적으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제어장치인 법률, 경찰권 또는 사법권이 없을 경우에 격렬한 욕망은 폭력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인간의 격정적 욕망이 쉽사리 폭력화된다고 할 때 평화로운 공존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분쟁을 제어하는 기능인 경찰력과 사법권이 없던 원시사회에서는 어떻게 사회 유지가 가능했을까? 지라르는 일종의 집단적 폭력 사건, 곧 널리 퍼진 폭력성이 우연히 한 사람에게로 집중되어 쏟아지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었다고 추정한다.

모방은 경쟁을 야기하고, 경쟁에서 다시 격정적 공격성이 발생하여 전염병처럼 사방으로 퍼지게 된다. 이렇게 한 사회가 온통 공격성에 만연되어 있을 경우에 우연히 한 사람이 자신의 적수를 쳐 없앨 수 있다. 이런 폭력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승리에 차 보여서 서로 그것을 따라 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둘이서 한 사람을 해치웠을 경우 더욱 승리에 차 보여서 다른 사람들이 계속 따라서 행동하게 된다.

이런 추세로 분산되어 있던 격정적 공격성은 짧은 한순간에 한 사람에게 몰리게 되고, 그는 죄인으로 지목되어 추방되거나 살해된다. 그리고 그 대가로 폭력으로 위협받던 사회는 다시 평화를 누리게 된다. 격정적 공격성이 한 사람의 희생양에게 집단적으로 분출됨으로써 사회가 안정을 되찾게 되면서, 희생양은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진다. 희생양은 저주받은 존재이자 동시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존재가 된 것이다.

지라르는 최초에 있었던 이런 ‘희생양 메커니즘’이 원시사회에서 희생제의를 통해 반복되었다고 주장한다. 원시사회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엄격히 통제된 의식의 틀 안에서 재현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인간들 내부에 있는 격렬한 폭력성이 희생제물에게 분출되도록 유도함으로써 공동체를 자기 파괴로부터 보호했다는 것이다. 작은 폭력으로 큰 폭력을 방지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은 그 본모습이 은폐된 채로 신성시되면서 사회를 지탱해 주는 역할을 했다.


구약성경 - 폭력의 신에서 평화의 하느님으로

슈바거는 성경에 나타난 폭력을 이해하는 데 지라르의 이론을 열쇠로 삼는다. 아벨에 대한 카인의 질투, 야곱과 에사우의 장자권 경쟁, 요셉을 시기한 다른 형제들의 음모, 다윗을 질투한 사울의 공격적 행동 등이 말해주듯이 구약성경에서도 경쟁과 질투가 쉽게 폭력으로 흐른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 경쟁과 질투는 모방을 통해 야기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구약성경은 모방을 비판한다. 곧 이스라엘 백성은 거듭 이방의 신들을 따라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거나 그런 짓을 했다고 고발을 당한다. 또한 호세아, 아모스,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들은 피비린내 나는 희생제물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는데, 이는 희생제의가 근본적으로 폭력에 기반을 둔 ‘희생양 메커니즘’의 예식적 반복으로서 참된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열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구약성경은 숨겨진 폭력의 메커니즘을 밖으로 드러낸다.

슈바거에 따르면, 구약성경은 인간 세상 근저에 은폐되어 작동하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이런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힘겨운 과정의 기록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구약에서는 아직 종점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인간 자신의 폭력을 신에게로 투사하는 원시사회의 상상이 계속 강하게 작용한다. 동시에 전혀 다른 신, 곧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사랑하고, 끊임없이 신의와 평화, 화해를 선사하는 하느님이 계시된다. 참된 하느님의 계시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폭력적인 신들이 점차적으로 우상으로 판명되는 역사적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구약성경에서는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모순에 찬 내용이 발견된다. 하느님은 금방 격정으로 가득 찬 격양된 존재로서 나타났다가 다시 용서를 베풀고 참을성이 많은 사랑의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이런 불분명함은 비로소 신약성경에서 풀리게 된다.


신약성경 - 세상의 희생양인 예수님

예수님은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청중들에게 그런 하느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셨다(마태 5,43-48). 또한 예수님은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과 함께 식탁의 공동체를 이루시면서 진정한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품으로 인간들을 불러모으려고 하셨다.

그러나 이런 복음과 사랑도 죄와 폭력에 깊이 물든 인간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여 서로 규합하였고, 마침내 그분께 폭력적인 죽음을 안겨주었다. 거룩한 분이 “저주받은 몸”(갈라 3,13)으로, 죄를 모르시는 분이 “죄”(2코린 5,21) 자체가 되셨다. 이 죄와 저주는 무고한 예수님에게 쏟아진 인간 내부의 공격성과 폭력을 뜻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희생양이 되신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대사제가 백성의 모든 죄를 한 마리의 염소 머리 위에 덮어 씌워서 광야로 추방하는 속죄예식이 있었다. 이 의식에서 상징적으로 이루어지던 바가 바로 예수님의 운명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희생양이 되셨다(1베드 2,24 참조).

구약성경에는 악인들의 악한 행동이 그들에게 되돌아옴으로써 그들에 대한 보복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등장한다(이사 50,11; 예레 44,8; 시편 7,13-17; 잠언 26,27). 예레미야도 이런 생각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반대자들의 악행이 그들에게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저주의 기도를 바쳤다(예레 18,21-23).

이에 비해 예수님의 행동은 전혀 달랐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도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예수님은 자신을 반대하여 규합한 자들이 쏟아붓는 폭력 앞에서도 복수심에 빠져 그들의 멸망을 기도하기보다는, 자신이 전한 비폭력의 메시지에 따라 행동하셨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은 처음으로 예수님에게서 온전히 멎게 되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런 예수님을 무덤에서 불러내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는 부활의 복음과 함께 인간들에게 다시 보내셨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자들에게 더 큰 용서로 응답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이해를 훌쩍 넘어서는 사랑의 행동을 보면서 피의 희생제물을 요구한 것은 하느님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희생양을 요구한 것은 인간들이다. 인간들 스스로 자신의 내부에서 처리할 수 없었던 공격성과 폭력성을 쏟아버릴 희생양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악인들의 폭력에 정당한 대응폭력을 행사하실 수도 있었지만, 구약에 예언된 ‘고난 받는 종’(이사 50,4-7)처럼 폭행을 몸소 짊어지는 길을 택하셨다. 하느님은 그런 예수님을 부활시켜서 새로운 공동체의 기초로 삼으셨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시편 118편을 인용하여 하신 예언의 말씀이 실현되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마르 12,10; 사도 4,11 참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사회질서의 기초가 크게 의문시되었고, 인간에게는 처음으로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비폭력의 길

예수님의 구원업적은 한 번에 모든 악을 송두리째 제거하는 방식으로 효력을 내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신앙인들 모두에게 당신의 길을 따르도록 요청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폭력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님처럼 폭력에 비폭력으로 응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폭력은 예수님을 추종하는 길이다. 하지만 이 길을 가려는 사람은 위험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숨겨진 폭력의 본모습을 드러내려는 사람은 누구든 이 폭력의 희생물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예수님 스스로 이것을 막장까지 쓰디쓰게 체험하셨다.

비폭력을 추구하였던 간디나 마르틴 루터 킹도 그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폭력에 의해 쓰러졌다. 그렇더라도 비폭력은, 인류가 진정으로 폭력을 극복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과 대응폭력의 악순환만 계속될 뿐이다.

비폭력의 길을 가려고 결심하더라도 한순간에 다시 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쉽다. 그만큼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폭력적 성향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비폭력의 길을 가려면 선의(善意) 이상의 것이 요구된다.

예수님의 수난의 운명을 예고한 ‘주님의 종’은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비폭력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고(이사 50,4-6), 그분의 영에 힘입어서 공정을 펼칠 수 있었다(이사 42,1).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가신 비폭력의 길을 따를 수 있다.

* 손희송 베네딕토 - 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교의신학를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3월호, 손희송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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