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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6: 아버지 최경환의 순교와 수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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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14 ㅣ No.1569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6) 아버지 최경환의 순교와 수리산


믿음의 ‘바윗덩어리’ 최경환, 두 달간 고문받다 옥사

 

 

- 수리산 성지 최경환 성인 묘소. 최양업 신부는 수리산을 들를 때마다 아버지 묘소를 찾아 정성껏 기도하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최양업은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과 함께 1836년 12월 3일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동행했다. 일행은 1836년 12월 28일 중국 변문에서 샤스탕 신부를 만났다. 이후 샤스탕 신부는 12월 31일 4명의 조선 신자와 함께 국경을 넘어 1837년 1월 15일 서울에 당도했다. 세 신학생은 샤스탕 신부의 길 안내자인 중국 서만자(西灣子) 출신 투안(Touan) 마리아노, 첸(Tchen) 요셉과 함께 6개월간 중국 땅을 걸어 종단한 후 1837년 6월 7일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했다. 

 

최양업은 1837년 6월 7일부터 1842년 2월 15일까지 약 4년 8개월간 마카오 유학 시절을 보냈다. 최양업은 이 시기 “작은 방에 외톨이로 남아 있다”(1842년 4월 26일자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고  표현할 만큼 큰 상심을 겪었다. 바로 동료 최방제의 죽음이다. 최방제는 마카오에 도착한 그해 11월 27일 위열병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더 큰 인간적 상심이 그에게 닥쳤다. 바로 부모의 순교다.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은 양업이 마카오 민란을 피해 필리핀 마닐라에 머물고 있을 때 (1839년 4월 6일~11월 말)에 서울 포도청에서 옥사했다.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도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됐다.

 

- 최경환 성인이 회장으로 있었던 수리산 뒤뜸이 교우촌에 조성된 수리산성지 순례자성당 제대 모습.

 

 

최양업은 부모의 순교 사실을 1843년 3월 중국 만주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 김대건에게 들었다. 김대건은 1842년 12월 27일 중국 변문 인근에서 조선 교회 밀사 김프란치스코를 만나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동료 양업의 부모가 순교한 것을 알았다.

 

최양업은 이때 심정을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고백했다. “저의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면 탄식과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의 부모와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했으니 제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1844년 5월 19일자 편지에서). 사제가 돼 조선에 입국한 최양업은 수리산 뒤뜸이 담배촌(현 경기 안양 만인구 병목안로 408)에 들를 때마다 집안 식구들을 모두 불러 아버지 최경환 묘소 앞에서 정성을 다해 기도하며 슬픔을 달래곤 했다.

 

 

부평에서 수리산 뒤뜸이로 이주

 

학자들은 최경환 성인 가족이 부평에서 수리산 뒤뜸이로 이주한 때를 1838년 10월 이후로 보고 있다(수리산성지 안내서에는 1837년 7월께 이주했다고 적혀 있음). 1838년 10월 부평에 사는 정 바오로가 조상 위패를 부수는 바람에 12명의 신자가 체포되고, 50여 명의 신자가 피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최경환 가족도 수리산으로 들어갔으리라 추정한다. 이 같은 학자들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자료도 있다. 최양업의 첫째 동생 최의정이 증언한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이다. 그는 “자신이 12살 되던 해에 수리산으로 들어갔다”고 밝혔다. 그가 1827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12살 되던 해는 1838년이다. 

 

수리산 뒤뜸이는 1820~1830년대에 충청도 신자들이 도망와 자리한 교우촌이다. 많은 이들이 최경환 일가처럼 1830년대 중반 이후 이곳에 피신했다. 1839년에는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살았다. 최경환의 신앙심과 인물됨을 익히 알고 있던 모방 신부는 그를 이곳 회장으로 임명했다. 

 

최경환은 1839년 기해박해가 터지자 서울로 올라가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둬 매장한 후 순교를 각오한다. 그해 7월 어느 날 새벽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을 덮쳤다. 회장인 최경환은 당황하지 않고 그들에게 “어찌 이리 늦게 오셨소. 우리는 오래전부터 초조하게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소.…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잠시 쉬었다가 아침을 먹고 기운을 돋운 다음 질서 정연하게 떠납시다”라며 반갑게 맞았다. 의연하고 담대한 최경환의 모습을 본 포졸들은 “이 사람과 이 가족들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라고 감탄했다.

 

- 수리산 뒤뜸이 교우촌 1900년대 모습. 최양업 신부 가족이 살던 1830년대 후반에도 뒤뜸이 마을은 아마도 이러한 정경이었을 것이다.

 

 

이날 어린아이를 포함한 40여 명의 신자가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다음날 최경환은 맨 먼저 끌러나가 심문을 받았다. 배교를 거부하자 형리는 주리를 틀어 그의 팔다리를 으스러뜨렸다. 또 곤장을 110대나 때렸다. 맏아들 최양업이 사제가 되기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더욱 혹독한 형을 받았다. 그래도 배교하지 않고 소리 내 기도하고 포졸이 준 성경을 읽으며 신자들에게 순교를 권면했다. 형리들은 최경환을 ‘바윗덩어리’라 불렀다. 두 달여 동안 하루씩 걸러 고문을 받은 최경환은 1839년 9월 12일 옥사한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함께 옥에 갇혔던 둘째 아들 최의정은 아버지 최경환의 유언을 기해ㆍ병오박해 시복재판에서 하느님 앞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내가 예수님의 표양을 따라 사형장으로 나가 칼 아래 죽자 하였더니 옥에서 죽게 되니 막비주명(莫非主命, 주님의 명령이 아님이 없음)이라”(101회차 재판에서).

 

 

양업, 아버지 묘소에서 한 서린 슬픔을 

 

최경환의 시신은 양업의 어린 형제들과 교우 두세 명에 의해 애오개(현재 서울 아현)에 임시 매장됐다가 그해 가을에 수리산으로 이장됐다. 

 

최양업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애틋했다. 귀국 후 그는 광주 소리울(현 경기 용인 수지 손골)에 살던 넷째 동생 신정(델레신포로) 부부를 수리산으로 이주시켜 아버지 묘소를 지키게 했다.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 최경환의 묘소를 찾을 때마다 왜 한 서린 슬픔을 토해냈을까. 아버지를 쏙 빼닮은 자상한 최양업 신부의 심성으로 보아 아마도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함께 순교하지 못했다는 자책일 것이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14일, 글·사진=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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