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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시복시성]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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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4-11 ㅣ No.1251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을 감사드립니다 (1) 한국순교자 124위 시복을 앞두고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이후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이 생겼다. 이들에 대한 시복시성 조사는 박해 때부터 시작됐으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러한 시복시성의 과정을 몇 단계로 진행돼 왔다. 첫째는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가 시성된 과정이고, 둘째는 2014년 시복이 결정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순교자 시복과정이다. 이 외에도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근현대 신앙의 증거자인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시성을 현재 추진 중에 있다.


1. 시복시성의 추진 이유

하늘나라에는 시복시성을 거치지 않은 많은 복자와 성인들이 무수히 많이 계시다. 이들이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영광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의 시복시성식은 초라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시복시성을 하는 이유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위한 일이다. 시복시성의 이유는 복잡하고 다양한 현재를 살아가는 신자들이 복자와 성인들을 기리며 일상생활에서 거룩한 삶을 살고 나누도록 이끌기 위한 일이다. 시복시성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은총과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며, 복자와 성인들이 하느님 앞에서 사람들을 위해 전구해 주기를 청하기 위한 일이고, 신자들에게 완덕의 모범을 제시해 주어 성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려는 일이다.


2. 시복시성과 순교

우리나라에서 시복시성이라고 하면 대부분 순교자를 먼저 생각한다. 순교자를 시복시성 하려 할 때 교회는 그들의 탁월한 신앙과 다른 이에게 모범을 보여준 삶과 정신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단순히 순교했다는 이유로 시복이나 시성이 되기는 어렵다. 순교 자체가 아니라,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고 증언하는 삶을 중요하게 본다. 신앙의 본질과 전형을 보여주고,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증거해 완전한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보여준 순교자들을 시복시성하려는 것이다.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은 단순히 복자나 성인의 숫자를 늘리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순교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지극한 은총과 사랑을 발견하고 찬미하며,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고 따르는데 의미가 있다. 시복시성 과정은 순교자에 대한 연구와 홍보를 통해 순교자의 평판과 하느님의 은총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신자들에게 영적 이익을 주려는 행위이며, 순교자들이 피를 흘려 전해준 신앙의 의미와 본질을 새롭게 깨닫고 신앙을 쇄신하려는 행위이고, 우리가 현재 받은 신앙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행위이다.


3. 시복시성의 추진과정

시복시성 과정은 교구 심사, 교황청 시성성 심사, 교황청 교령 발표 순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교구 심사는 관할권을 가진 주교가 공적이고 공식적인 행위로 하는 실질적이고 법적 효력을 갖는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예비 심사라 표현한다. 시복대상자를 선정하여 관할권장인 주교에게 청원하면 주교는 대상자에 대해 조사를 착수한다. 첫째, 대상자가 순교자이면 순교자의 조건을 충족했는지 살펴본다. 참으로 육체적 생명이 죽었는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진리에 대한 박해자의 증오 때문에 죽었는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지키려고 기꺼이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 평판에 대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장애가 없는지 조사한다. 순교는 하느님께서 순교자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이기에 시복시성의 중요한 사안이다. 둘째, 대상자가 증거자이면 사망 후 최소 5년이 지난 다음 영웅적 덕행과 실천, 성덕의 평판, 성덕의 산물인 기적,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장애가 있는지 없는지 조사한다. 기적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발생되는 특별한 현상이요 은총으로, 하느님이 대상자와 함께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순교자나 증거자에 대한 조사가 끝나면 교구에서는 전문가를 출석시킨 가운데 재판을 열어 증인과 증언에 대해 심문하고 조서를 작성한다. 교구의 모든 심사가 끝나면 주교는 대상자에 대한 공적 경배를 금지시키고, 유해가 있다면 최대한 보존하려고 힘써야 한다. 이렇게 교구 심사가 끝나면 교황청 시성성에 문서를 제출하고, 교황청에서는 심의를 거쳐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시복에 장애가 없음을 조사한다. 조사가 끝나면 추기경 회의를 열어 시복시성을 결정하고 교황의 재가를 얻어 시복시성을 발표한다. 시복은 통상적으로 시복을 추진한 교구에서 교황청 시성성 장관이 거행하며, 시성은 로마에서 교황이 거행한다.


4. 103위 순교성인의 시성 과정

1838년 말 박해가 시작되자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박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조사를 시작했다.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7년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포함한 『증보판 기해일기』를 완성해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냈다. 1847년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이 기록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이 순교자 행적 번역본이 1847년 10월 15일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제출돼 시복 소송절차가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1857년 9월 24일 교황 비오 9세의 윤허를 받은 예부성성은 82명의 순교자를 ‘가경자’로 발표했다. 교황청 위원들은 여러 번의 조사와 검증과정을 거친 후 1905년 7월 26일 예부성성에 기해와 병오박해 시복 조사 내용을 제출했다. 교황청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 관계자 회의를 열었고,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79위 순교자들을 시복했다.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에 대한 조사는 1876년부터 시작됐으며, 1884년 뮈텔 신부는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1890년 제8대 조선교구장인 된 뮈텔 주교는 조사를 본격화 했으며 1895년 르 장드르 신부가 877명 순교자에 대한 『치명일기』를 간행했다. 1899년 6월 19일부터 1900년 11월 30일까지 교구 시복재판을 열어 100명의 증인이 135회에 걸쳐 심문을 받았고, 1921년 2월 12일부터 1926년 3월 18일까지 교황청 시복재판을 열어 85명의 증인이 129회에 걸쳐 심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과 『병인박해 치명사적』이 정리됐다. 이 자료가 교황청으로 발송됐고, 1952년 3월 2일 교황청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교황청 시복 관계자 회의를 거쳐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성전에서 24위 시복식이 거행됐다.

기해와 병오박해 복자 79위와 병인박해 복자 24위, 총 103위에 대한 시성 안건은 1971년 12월 주교회의에서 거론됐고, 1975년 9월 전국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103위 복자의 시성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1976년 4월 주교회의 춘계 정기 총회에서 103위 복자의 시성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하고 담당주교에 김남수 안젤로 주교를 선출했다. 1977년 10월 박준영 루도비코 신부를 로마 주재 법정 대리인으로 임명했고, 1978년 4월 13일 103위의 시성 건이 교황청에 정식 접수됐다. 1982년 11월 19일 로마의 추기경 회의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천주교회 발생 200주년 기념행사에 교황을 초청했고, 1983년 3월 24일 한국 주교단의 명의로 ‘기적 관면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했다. 1983년 9월 27일 특별회의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의 시성을 승인했고,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시성식이 거행됐다. 이 시성식은 교황이 현지에서 거행한 최초의 시성식이었다. [월간빛, 2014년 4월호, 서준홍 마티아 신부(대구대교구 성모당 담당)]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을 감사드립니다 (2) 한국순교자 124위 시복을 앞두고



5.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추진 과정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는 1982년 9월 9일 제1차 시복시성 추진위원회를 열어 초기 순교자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기로 했다. 103위 성인에 대한 시성과 후속 조치로 인해 시복 추진이 잠시 주춤했지만 수원교구와 전주교구 등에서 활발히 시복을 추진했다. 그러다가 한국주교회의에서 1997년 시복을 통합해 추진을 결정했고 1999년 1월 28일 첫 회의가 열렸다.

2001년 3월 22일 주교회의 춘계 정기 총회에서 시복 시성 추진 담당 교구장 주교에 박정일 미카엘 주교를 선출하면서 청구인을 주교회의로 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2001년 6월 9일 이를 시성성에 알렸다.(Prot. No. 108/2001) 2001년 10월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11월 30일 ‘하느님의 종’ 선정 기준을 결정했다. 2002년 9월 2일 전국 공용 “시복시성 기도문”을 제정했다. 2002년 9월 4일 시성성은 하느님의 종 “윤지충과 동료 123위” 시복 건을 받아들이고 마산교구에 관할권을 부여했다.(Prot. N. 1664-2/01) 2003년 10월 6일 시성성은 하느님의 종 “윤지충과 동료 123위”의 시복 심사에 대해 아무 “장애없음”을 통보했다.(Prot. N. 1664-1/89) 2003년 11월 20일 역사전문가위원회가 구성돼 여러 차례 시복 대상 순교자에 대한 추가 조사와 연구 작업을 했다. 시복 재판이 2004년 7월 5일 시작되어 증인들에 대한 소환 조사, 문서 증거 제출, 공적 경배가 없음을 조사하는 현장방문, 소송 기록물 공표, 보충 증거 제출, 번역문서 제출, 사본 작성과 문서 대조 등의 일을 했다.

대구대교구에서도 2006년 4월 19일부터 20일까지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다. 시복 재판은 총 36회기로 2009년 5월 20일에 끝났으며, 2003년 9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순교자 약전과 5권의 자료집이 발간됐다. 주교회의는 시복시성 조사가 완료되자 2009년 6월 3일 시복 조사 문서들을 시성성에 제출했다. 시성성은 이를 접수했으며, 2013년 3월 12일 역사위원회 심의와 10월 1일 신학위원회 심의를 통과시켰다. 2014년 2월 24일 교황청 시성성 추기경과 주교단은 124위에 대한 심의를 통과시켰고, 2월 7일 교황은 시복 결정 교령 발표를 허락했다. 이로써 124위에 대한 시복 과정이 마무리됐다.


6.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에 대한 간략한 내용

하느님의 종 124위는 1791년 신해박해 3위, 1795년 을묘박해 3위, 1797년 정사박해 8위, 1801년 신유박해 53위, 1814년의 1위, 1815년 을해박해 12위, 1819년의 2위, 1827년 정해박해 4위, 1839년 기해박해 18위, 1866년과 1868년의 병인-무진박해 19위, 1888년의 1위로 분포돼 있다. 주로 선교사 없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실천한 선조들이 순교한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이 시복 추진의 중심에 있으며, 103위 성인의 추진 과정에 빠진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중 지역에서 순교 사실이 새롭게 연구되고 현양된 분들이 포함됐다. 그리고 사제로서 첫 번째 순교자인 주문모 신부가 포함돼 있다.

1791년 신해박해 3위 : 1791년 12월 8일 한국천주교회에서 첫 번째로 참수된 윤지충 바오로와 그 뒤를 이은 권상연 야고보는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했다. 이로부터 2년 뒤 원시장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에서 매를 맞아 죽음으로써 순교했다.

1795년 을묘박해 3위 : 윤유일 바오로와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는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매를 맞으며 순교했다.

1797년 정사박해 8위 : 정사박해로 이도기 바오로는 1798년 충청도 정산에서, 방 프란치스코와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1799년 홍주에서, 정산필 베드로는 1799년 덕산에서 순교했다. 또한 1799년 원시보 야고보, 1800년 배관겸 프란치스코가 청주에서 순교했다.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1800년 해미에서 순교했다.

1801년 신유박해 53위 : 신유박해는 124위 중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낳은 박해이다. 1801년 3월 조용삼 베드로는 경기도 감영에서 옥사했다. 4월 최창현 요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최필공 토마스, 홍낙민 루카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같은 날 처형된 이승훈 베드로는 아직 순교 사실에 대한 이론이 있었지만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됐다. 4월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은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했고 윤유오 야고보는 경기도 양근에서 순교했다. 5월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복혜 칸디다, 정인혁 타대오, 정철상 가롤로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음력 4월 초 심아기 바르바라가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했으며 5월 31일 조선의 첫 번째 선교 사제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에서 장렬하게 순교했다.

7월 강완숙 골롬바, 강경복 수산나, 김현우 마태오, 문영인 비비안나, 김연이 율리아나, 이현 안토니오, 최인철 이냐시오, 한신애 아가타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7월 윤점혜 아가타가 양근에서, 정순매 바르바라가 여주에서 순교했다. 음력 5월 김이우 바르나바가 서울 포도청에서, 이국승 바오로가 공주에서 순교했다. 8월 김광옥 안드레아가 예산에서, 김정득 베드로가 대흥에서, 한정흠 스타니슬라오가 김제에서, 김천애 안드레아가 전주에서, 최여겸 마티아가 전라도 무장에서 순교했다.

10월 김종교 프란치스코와 홍필주 필립보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전주에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순교했다. 11월 이순이 루갈다의 남편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이 전주에서 순교했고, 12월 현계흠 바오로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음력 1801년 12월 김사집 프란치스코가 청주에서 순교했으며 손경윤 제르바시오, 이경도 가롤로, 김계완 시몬, 홍익만 안토니오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정광수 바르나바는 여주에서, 한덕운 토마스는 남한산성에서, 황일광 시몬은 홍주에서, 홍인 레오는 포천에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양근에서, 유중철 요한의 아내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성 마태오는 전주에서 순교했다. 을해박해 직전인 1814년 12월 해미에서 성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가 옥사했다.

1815년 을해박해 12위 : 음력 4월 김윤덕 아가타막달레나가, 음력 5월 김시우 알렉시오와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그해 말 서석봉 안드레아가 대구에서 옥사했다. 김강이 시몬은 12월 원주에서 순교했다. 김희성 프란치스코와 구성열 바르바라, 이시임 안나, 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 김종한 안드레아와 김화춘 야고보가 대구 관덕당 형장에서 12월에 순교했다. 1819년 8월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가 서울에서 참수됐다.

1827년 정해박해 4위 : 6월 전주에서 이경언 바오로가 순교했고, 11월 박경화 바오로가, 12월 김세박 암브로시오가 대구에서 옥사했다. 1835년 안군심 리카르도가 대구에서 옥사했다 .

1839년 기해박해 18위 : 5월 대구에서 이재행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가 순교했다. 전주에서 이일언 욥, 신태보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정태봉 바오로, 김대권 베드로가 순교했다. 9월 최해성 요한이 원주에서 순교했다. 10월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1월 심조이 바르바라가 전주에서 옥사했다. 12월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김조이의 어린 딸로, 원주에서 최 비르지타가 교수됐다. 1840년 1월 홍재영 프로타시오, 최조이 바르바라, 이조이 막달레나, 오종례 야고보가 전주에서 순교했다.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당고개에서 순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 19위 : 역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가 병인박해이다. 3월 청주에서 오반지 바오로가, 대구에서 신석복 마르코가 순교했다. 12월 공주에서 김원중 스테파노가 순교했다. 청주에서 순교한 장 토마스와 경상도 함안에서 순교한 구한선 타대오는 1866년 어느 달에 순교했는지 확인되고 있지 않다. 1867년 1월 진주에서 정찬문 안토니오가, 통영에서 김기량 펠릭스베드로가, 상주에서 박상근 마티아가 순교했다. 서울에서 순교한 송 베네딕토와 베드로, 이 안나 가족 순교자는 어느 달에 순교했는지 확인되고 있지 않다. 1868년 여름 동래에서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가 순교했다. 9월 이양등 베드로와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가 울산에서 순교했다.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순교자가 경기도 죽산에서 순교했다. 10월 박대식 빅토리노가 대구에서 순교했다. 1888년 4월 신앙의 자유가 생겼지만 지방의 인식 부족으로 진주에서 윤봉문 요셉이 순교했다.


7. 복자와 성인에 대한 공경과 현양에 관한 제언

첫째, ‘시복시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여야 한다. 과거 103위 시성 때 우리 신자들은 성인에 대해 단순히 순교했다는 사실과 성인들을 기리는 행사에만 치중했다. 신앙대회나 현양대회, 도보 성지순례 등의 행사를 준비하고 거행하는 것으로 끝났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복자나 성인이 지닌 신심과 삶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교회의 복자와 성인 안에서 힘있게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깨닫고, 그들이 신자들의 모범과 전구자임을 체험해야 했다. 그래서 복자와 성인들이 지녔던 믿음과 용기를 배우고 익혀야 했다.

둘째, 순교 신심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순교란 물리적 죽음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한 정신이다. 영원한 구원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하고 이를 위해서 생명까지도 아깝지 않게 바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다. 그렇기에 순교는 죽음을 무릅쓴 신념의 행위이지 죽음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 순교를 죽음과 연결시키려고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순교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유혹을 극복하는 것이다.

셋째, 순교의 의미와 정신에 대해 지속적으로 교육해야 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현양 운동을 해야 한다. 과거에는 행사를 위한 행사가 주를 이루고, 새 영세자들의 세례명이나 신설 본당의 주보를 한국 성인으로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월간빛, 2014년 5월호, 서준홍 마티아 신부(대구대교구 성모당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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