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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5: 주님의 종, 로마노 과르디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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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29 ㅣ No.333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 주님의 종, 로마노 과르디니 (중)

신앙의 눈으로 세상 바라보며 교회와 세상의 만남 시도


- 50세 과르디니 사진.


신앙과 신학의 출발점인 교회

과르디니 신앙과 신학의 출발점은 교회다. 무엇을 전공해야 할지 정하지 못해 방황하던 대학생활 초기에 과르디니는 신앙의 홍역도 함께 치른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교회생활이나 기도생활은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신앙의 근거라고 생각했던 내용들이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방황하던 과르디니에게 신앙의 열쇠를 찾게 해준 것은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라는 말씀이었다. 진리를 찾고 그 안에서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 기준(자기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목숨을 받아주고 다시 나에게 더 큰 생명으로 되돌려 줄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그것은 단순히 신(神)이나 예수상(像)일 수 없다. 사람들이 신이나 예수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인간의 욕구와 바람이 투사된 것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르디니는 개인의 신앙 결단을 요구하는 최종 기관은 전례와 교의, 전통과 교도권 등 객관성을 바탕으로 개인의 사적 체험과 생각으로부터 계시 내용을 보호하고 하느님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교회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떠한 격렬한 감동이나 종교적 체험이 아닌, 차분한 이성적 논리의 전개를 통해 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고 그 이후로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교회에 관한 이러한 확신은 단순히 신앙생활을 위한 지침으로 그치지 않고 신학방법론으로도 이어졌다. 과르디니는 1922년 본대학 교의신학 교수 취임강연에서 캔터베리의 안셀모 성인의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란 문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종합하고, 이를 자신의 신학적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과르디니에게 인식이란 단순한 객관적인 사실 확인이 아니라, 대상과 실존적 만남을 의미했다. 또 그에게 신학 대상은 추상적 개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초자연적 계시 사건과 그 내용, 교회 공동체와 삶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 살아있는 교회 공동체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신앙의 내용을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학문 작업과정에서 교회의 교의(Dogma)들은 신학적 사고를 위한 좌표체계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청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과르디니(왼쪽), 그의 강의실은 강의를 들으려는 학생들로 언제나 만원이었다.


종교철학과 가톨릭적 세계관 강의

본대학에서 교의신학 교수로 첫발을 내디딜 무렵, 그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추구하던 바를 대학강단에서 펼칠 기회를 맞았다. 이 즈음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은 1차 세계대전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특유의 확고한 입장과 태도로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고 오랜만에 활기를 띠던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개신교가 지배적인 베를린대에서도 가톨릭 대학생들이 가톨릭 진리에 관한 애용을 들을 수 있는 강의를 개설하자는 의견을 냈다. 물론 베를린대 신학부나 철학부가 반대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결국 강의는 브레슬라우대학 주최로 열고, 베를린대에 객원교수를 파견해 베를린대에서 강의한다는 합의로 이뤄질 수 있었다.

새로 개설되는 강의를 할 교수로 과르디니가 물망에 오른 것은 1922년 가톨릭 대학인 모임에서 했던 ‘교회의 의미’에 관한 강연이 계기가 됐다. 정부의 가톨릭 담당 고위공무원과 그의 부인이 이 모임에 참석해 그의 강연을 감명 깊게 들었던 것이다. 얼마 후 과르디니는 ‘종교철학과 가톨릭적 세계관’이라는 이름의 강의를 베를린대에서 할 생각이 있는지에 대한 문의를 받는다. 베를린대가 이 강의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라는 점, 그리고 강의 내용은 교수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내용도 전달됐다.

강의를 수락하는 것은 큰 모험이었지만 과르디니는 이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쾰른대 철학교수였던 막스 쉘러의 조언과 격려가 그에게 큰 힘이 됐다. 쉘러 교수의 적극적 권유에 힘입어 과르디니는 철학과 신학의 중간 영역에서 자신의 재능에 부합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포부를 안고 1923년 베를린으로 향한다.

그가 베를린대 객원교수로 결정된 과정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유명한 교회사가인 하르낙 교수가 가톨릭 강좌 개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동료 교수들에게, 과르디니라는 사람이 이곳에 와서 할 이야기가 있고 또 들어줄 사람이 있으면 오래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폐강돼 자연스럽게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르디니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많았고, 나치 정권에 의해 강제로 폐강되기까지 그의 강의는 16년 동안 이어졌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염려

- 과르디니는 70세 생일 기념강연에서 “자신이 포기한 것은 신학이었고, 얻은 것은 세상이었다”고 말했다. 사진은 72세 때 모습.


20세기 초반부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이르는 시기에 교회는 ‘근대주의’ 위협에 처했다. 이 사조는 자연과학, 역사학 등의 발전에 힘입어 가톨릭교회의 근본인 계시, 신앙, 교리 등 불변의 진리에 대한 믿음을 뒤흔들고, 모든 것을 주관적이고 내재적인 의미로 축소하려 했다. 이때 교회는 세상과 관계를 적대적 또는 비판적 대치 관계로 이해하고, 교회 구성원을 세상이라는 위험 지역으로부터 떼어 내 안전한 교회 안에서 보호하려 했다. ‘완벽한 사회’이며 안전 지역인 교회는 세상과 대화나 세상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하자며 공의회를 제안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와 세상 관계를 새롭게 정의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목헌장”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 특히 사목자들과 신학자들의 소임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현대의 다양한 말을 경청하고 식별하고 해석하며 이를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다”(44항)며 교회가 현대세계에서 받는 도움을 언급했다.

실제로 신자들은 교회와 세상이라는 구별된 영역을 오가며 생활하지 않는다. 세상은 근대와 현대인들이 생각하듯 자신의 근거를 스스로 만든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세상은 경계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창세기 1장 말씀처럼 ‘좋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은 하느님이 강생해 세상 일부가 되실 만큼 하느님 사랑을 받는 존재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는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구체적인 세상과 올바로 만나, 세상을 세상답게 발전시키고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 과르디니의 확신이었고, 세상과 인간에 대한 염려는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주제였다.


베를린대학에서 성공

호교론적인 따분한 강의가 될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예상과 선입견을 뛰어넘어, 과르디니는 16년 동안 강의를 했다. 그가 베를린에 오래 머물 수 있었던 것은 가톨릭교회 교리 해설이나 구태의연한 호교론을 펼치지 않고, 가톨릭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이 제기하는 질문을 그리스도교 계시에 비춰 해답을 찾아보는 작업을 통해 신앙과 세상의 만남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과르디니는 자신의 베를린대 취임 강연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세계관이란 신앙으로부터 세상의 실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 이렇게 해서 나는 튀빙겐대 학창시절에 신앙의 의미로 인식했던 바로부터 결단을 도출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계시 안에 기반을 두고 계시에 비춰 하느님의 작품인 세상을 그 고유한 진리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했다.”

베를린대 강의는 우연한 기회에 주어진 것이지만, 그는 이를 통해 그가 청년시절부터 바라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는 쉘러 교수 조언에 따라 사물, 인간, 작품 등 구체적 세상을 관찰하고, 책임 의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학문적 수준에서 관찰한 바를 학생들에게 강의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크라테스, 아우구스티노, 단테, 파스칼, 릴케 등의 작품을 강의 주제로 삼았다. 서양 정신문화사의 중요한 인물에 대한 그의 강의는 문학도 아니고 신학도 아니었다. 그것은 둘의 만남이고 바라봄이었다.

그는 세계관 강의를 위해 신학 강의를 포기해야 했지만, 신학을 완전히 도외시하지 않고 신앙인의 관점에서 세상의 구체적인 현실을 바라보고, 둘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활동 영역을 구축했다. 그는 70세 생일 기념강연에서 자신이 포기한 것은 체계적 신학이었고, 자신이 얻은 것은 ‘세상’이었다고 했다. 실제로 그의 강의실은 학문의 경계를 넘어 찾아오는 수많은 학생과 개신교 풍토의 베를린대 지성인들로 언제나 만원이었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16일, 김영국 신부(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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