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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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시복 대상자 약전: 이재철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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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13 ㅣ No.1545

[시복 대상자 약전] 이재철 베드로 신부

 

 

덕원-함흥 교구

1912년 5월 12일생, 서울

세례명 : 베드로

사제 서품 : 1940년 3월 25일

소임 : 함흥대목구 성진 본당, 청진 본당, 함경도 순회 사목

체포 일자 및 장소 : 1950년 6월 25일, 청진 본당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7월, 청진(추정)

 

 

이재철 베드로 신부(李載喆, 1912-?)는 1912년 5월 12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집안이나 성장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고, 다만 그의 누나가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의 이철희 보니파시아 수녀(1906-?)였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덕원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0년 3월 25일,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Bonifaz Sauer, 辛上院, 1877-1950)의 주례로 구대준 가브리엘(具大浚, 1912-1950)신부와 함께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재철 신부는 즉시 사목현장에 뛰어들었다. 원산 본당 제2 보좌로 사목활동을 시작한 이재철 신부는 강론이 탁월하여 키케로라는 별명을 얻었다. 1941년에 쓴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편지에 이재철 신부가 언급된다. 본당을 신설하여 그에게 맡길 계획이라는 편지 내용이다. “성령강림대축일 후에 새 본당 건립을 시작해야합니다. 한국인 이 베드로 신부를 본당신부로 내정해 두었습니다. 그는 매우 젊고 또 많이 배워야 하지만 열정만큼은 대단합니다. 이 베드로 신부에게 맡길 지역은 주민이 35만인데, 그들 가운데 흩어져 있는 가톨릭 신자부터 찾아내야 합니다. 현재 견실한 150명 정도 모여 있습니다.” 이재철 신부는 1941년 7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성진 본당 초대 주임으로 사목활동을 했다. 그는 사목자로서 늘 겸손한 자세로 신자들을 대했고 언제나 높임말을 써서 신자들이 오히려 어려워할 정도였다. 또 열성적으로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권면하였고 특히 노동자와 일본인 사목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이 임박하여 소련 공군기들이 청진까지 폭격하여 소련에 인접한 함경북도 지역은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월남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시 중국 땅이 된 만주에서 내려온 피난민들도 있었다. 이재철 신부는 조용히 본당을 지키며 남쪽으로 피난하는 선교사들에게 최대한 편의를 봐주려고 노력했다. 청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혼란을 피해 원산 수녀원으로 복귀한 겔트루드 링트(Gerturd Link, 林仁順, 1908-1999) 수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마침내 목적지가 눈앞에 보였다. 작은 종탑이 세워진 아담한 성당과 그 옆에 한옥 사제관이 있었다. (중략) 이 신부님은 본당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성진을 떠날 수 없었다. 덕분에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제관과 성당은 거의 비어 있었다. 최소한의 것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안전한 곳에 숨겨 두었다고 했다. 우리는 성진에서 큰 환대를 받았다.”

 

성진 천주교회 신설 기념(1941년, 성진)

 

 

해방 후 공산당은 소련의 비호 아래 급속도로 세력을 규합했다. 1946년 2월 9일,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3월 5일, 북조선 토지개혁령이 선포되어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덕원 수도원은 소유 전답의 2/3와 임야 전체를 잃었다. 본당 신부들은 몸소 밭을 일구며 생계를 꾸려갔다. 1947년에 쓴 루치오 로트(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원장 신부의 편지에 보면 성진 본당 사정이 언급되어 있다. “성진의 이 베드로 신부는 본당에 자영 농장이 없어서 우리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신자도 아주 조금밖에 없습니다.” 1948년 12월 1일,다고베르트 엥크(Dagobert Enk, 嚴光豪, 1907-1950) 당가 신부가 체포된 후 덕원 수도원은 종말을 각오했다. 루치오 로트 원장 신부는 이듬해 1월에 다시 한 번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독일인 신부들은 수도원 가까이로 불러들이고, 비상시에 몸을 숨기는 데 좀 더 유리한 한국인 신부들을 멀리 떨어진 본당으로 보냈다. 구대준 신부는 흥남에서 회령으로, 이재철 신부는 청진으로 옮겨갔다. 신자 수가 겨우 스무 명이었던 성진은 당분간 사목자가 없는 본당으로 남았다.

 

1949년 5월 10일, 덕원 수도원의 독일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부들이 체포될 때, 이재철 신부는 청진에 있었기 때문에 화를 모면했다.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 비밀리에 함경도 북부 지역(청진, 회령, 웅기, 나남, 성진) 교우들을 돌보았다. 당시 이재철 신부와 전교회장에겐 금족령(禁足令)이 내려져서 성사를 주려고 30리(12킬로미터)만 외출해도 내무서원이 미행하였다. 그럼에도 이재철 신부는 필사적으로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성사를 집전하였다. 웅기에 성사를 주러 갔다가 체포되어 내무서에서 일주간 구류를 당하기도 했다.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던 순간부터 이재철 신부는 언제라도 자신이 체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준비하고 있었다. 여름이었음에도 겨울 내복을 입고 지냈고 전교회장을 불러 자신이 체포될 경우 처리해야 할 일들을 일러두었다. 교적도 미리 정리해놓고 자신이 체포되면 김 교수라는 신자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대신 가짜 교우 명단을 만들어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이재철 신부는 1950년 6월 25일 오전 2시 30분 경, 청진 본당에서 체포되었다. 그 자리에는 당시 최명화 베드로(崔命化, 1924-1975, 대구 대교구 소속 사제) 부제와 정환국 알로이시오(鄭桓國, 1929-2000, 부산 교구 소속 사제) 신학생이 함께 있었다.

 

1950년 10월 12일, 당시 산 속에 피신했던 청진 본당 전교회장 김진해 마리아(1914-2014)는 공산당원이 된 어떤 교우로부터 80명 정도의 종교 인사들(신부와 목사)이 청진항 등대에서 총살되어 바다에 던져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후 약 1주일쯤 후 청진항 부근 다른 총살 현장에서 간신히 살아온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김 마리아는 그 사람을 찾아갔다. 그는 같은 날 종교 인사들도 트럭에 실려 해변으로 끌고 갔고, 밤 10시경 두 사람씩 묶인 채 총살 당했다고 증언했다. 김 마리아와 신자들은 이철재 신부의 시신이라도 찾아보려고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았지만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고 청진을 떠날 수밖에 없어 시신을 찾지 못했다.

 

* 자료출처 : 가톨릭 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2003년), 원산 수녀원사(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 1988년), 분도통사(분도출판사, 2009년), 덕원의 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어둠에서 은총의 빛을 따라(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2012년), 오딜리아 연합회 편람(오딜리아 연합회, 1950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6년 봄호(Vol.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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