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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23: 책임의 성교육을 위한 국가의 책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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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12 ㅣ No.1514

[이광호 소장의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 (23) 책임의 성교육을 위한 국가의 책임은?


잉태의 기쁨 나누는 사회 함께 만들어야

 

 

2017년 11월 26일, 청와대는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23만 명의 동의를 얻은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한 공식 답변을 내놓았다. “현행 법제는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조국 민정수석은 문제의 핵을 정확히 지적했다. 이는 임신, 출산, 양육에 대한 국가와 남성의 책임이 우리나라 법에는 전혀 없고, 낙태할 경우 여성만 처벌하는 불합리가 우리 법제의 맹점이라는 사실을 정부가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선되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낙태죄 폐지가 아니라, 국가와 남성의 책임을 법제화하는 작업이다. 우리가 선진국으로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는 낙태죄 폐지보다 앞서서 국가와 남성의 책임이 법제화되어 있고, 이것이 남성들에게 철저한 책임의 성교육을 시키고 있다.

 

 

임신에 대한 국가와 남성의 책임이란?

 

EBS의 지식채널e ‘그 남자의 권리’는 남성이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국가의 책임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캐나다에 사는 남자와 여자, 덴마크에 사는 남자와 여자. 서로 사랑하는 젊은 연인들. 그러나 성인이 되기 전 준비 없이 맞이한 임신이라는 큰 변화에 대해 여자 청소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변화예요. 아이를 선택한 이상 제 모든 생활이 바뀔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남자 청소년은 “아이 이름을 제 성을 따라 지었어요. 이제 아이의 양육비는 제 책임이 됐다는 뜻이죠. 이 책임을 피할 수는 없어요”라고 말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학교 다니는 청소년이 임신해도 여학생은 대체로 아이를 낳고, 남학생은 아버지가 되어서 양육비가 포함된 책임을 진다. 법과 제도가 임신한 청소년에게 출산과 책임의 선한 선택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미혼부는 양육비 책임을 회피할 경우, 여권 사용 정지, 운전면허 정지, 벌금 혹은 구속까지 뒤따르게 된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아동수당, 교육비 등 아이가 자라는 동안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모든 비용이 아버지 책임이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제부터 제가 한 아이의 법적인 부양자가 됐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된 한 남자 청소년의 말이다. 덴마크의 미혼부는 16세 이상의 남성에게 적용되는 ‘미혼부 책임의 법제화’에 따라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부양 책임을 져야만 한다. 덴마크의 정치학자 아테네 보르코르스트는 “현재의 복지국가를 유지할 여유가 있건 없건, 미혼모에 대한 혜택만큼은 철저히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어린 엄마들도 보통의 엄마들과 똑같이 복지 혜택을 차별 없이 누리고, 그 아이들도 편견 없는 시선 속에서 자랄 수 있다. 

 

미혼부의 양육비 지급을 규정해 왔던 미국에서 2006년 24세에 미혼부가 된 컴퓨터 프로그래머 맷 두베이가 국가에 소송을 제기했다. “원치 않는 임신의 경우, 여성들은 낙태, 입양, 양육 중에서 선택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니 남성들도 재정적 책임을 거절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미혼부의 책임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일어났고, 그 남자의 권리에 대해 법원은 “그와 비슷한 처지의 남성들이 겪는 불평등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부모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보장받아야 하는 아이의 권리”라고 판단했다. 법이 철저하게 약자의 편에 서서 정의로운 판단을 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 2001년 이후 미혼부 책임의 법제화 논의가 몇 차례 시도되었지만 무산되었다. 현재 한국은 미혼모, 미혼부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우리 정부가 내놓은 낙태보완 대책

 

선진국은 임신, 출산, 양육과 관련된 남성의 책임을 국가가 법으로 철저하게 물어서 최약자인 아기와 여성을 보호하는 살림의 정치, 생명의 정치를 철저하게 시행하고 있다. 책임이 그 사회의 가장 밑바탕에 깔린 시민의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가 내놓은 낙태 보완 첫째 대책은 무엇일까?

 

“정부 차원에서 임신중절 관련 보완 대책도 다양하게 추진하겠습니다. 먼저 청소년 피임 교육을 보다 체계화하고, 여성가족부 산하 건강가정지원센터를 통해 가능한 곳부터 시범적으로 전문 상담을 실시하겠습니다.” 

 

청소년 피임 교육의 체계화가 정부가 제안한 첫째 대책이다. 임신과 관련된 국가와 남성의 책임이 완전히 빠져 있다는 정확한 진단을 했는데, 처방은 오류를 범한 것이다. 민정수석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이 대부분의 OECD 선진국에 양육비 책임 법이 강력하게 시행되고, 그것이 학교 성교육과 연계되어서 청소년들에게까지 철저한 책임의 성교육을 시킨다는 사실을 몰라서 이런 오류 처방을 내렸을까? 청와대 참모들이 이 사실을 모를 만한 분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청소년 피임 교육 체계화라는 오답을 공식 답변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배경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한국 사회를 살리는 책임의 성교육

 

정부가 제시해야 할 상식적인 대책은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양육비 책임 법과 청소년 책임교육 강화다. 국가와 남성의 책임이 완전히 빠져 있다는 정확한 진단을 했으면 그 책임을 명문화하고 시행하는 법이 있음을 국민에게 알리고, 그 입법이 가능하도록 국회와 협의하는 것이 정부의 당연한 의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부는 이 의무를 피해갔다. 양육비 책임 법을 제정, 시행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의 대수술이 필요한데, 이것이 정부 차원에서 쉽지 않은 듯하다.

 

“소의치병(小醫治炳), 중의치인(中醫治人), 대의치국(大醫治國),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중간 의사는 사람을 고치고 큰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 자네도 잘 알지? 장준혁이는 아직 작은 의사야. 기대도 안 했어. 요즘 의학계엔 그런 의사투성이야. 최 교수 같은 중의를 찾기 어렵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

 

“아닙니다. 저 역시 소의에 불과합니다.”

 

“자넨 훌륭한 의사야. 게다가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으려는 순간부터 이미 대의의 길에 들어선 거야.”

 

“아닙니다. 교수님. 그런 말 들을 자격 없습니다.”

 

“이 일이 왜 어려운 줄 아나? 옳은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나는 그 길이 아름다운 길이라고 믿어. 세상엔 말이야, 힘들지만 이겨내고 가야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드라마 ‘하얀거탑’의 명장면 중 하나다. 나라를 고치는 대의(大醫) 역할을 정치권에서 하기 어렵다면, 시민사회가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이미 지시한 바처럼 비혼모에 대한 사회 경제적 지원도 구체화할 전망입니다. 적극적 경제적 지원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것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은 물론 정부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입양문화 활성화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비혼이건 경제적 취약층이건 모든 부모에게 출산이 기쁨이 되고 아이에게 축복이 되는 사회를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국가의 의무와 역할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겠습니다.” 

 

조국 민정수석의 답변 마지막 구절이다. 양육비 책임 법이라는 국가의 의무와 역할을 정부가 수행할 수 없다면,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국민 개인이 선한 선택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사회 구조를 디자인해주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5월 13일, 이광호 베네딕토(사랑과 책임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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