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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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몸의 신학12: 교황님의 혼인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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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9 ㅣ No.802

[몸의 신학] 교황님의 혼인영성


몸과 혼인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가르침 (12)

 

 

시작하며

 

지난 9월 어느 텔레비전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아빠는 왜’라는 동시인데,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가 썼답니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 주어서.  /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철부지 아이야 느끼는 대로 표현했다고 치고, ‘그 집의 아내에게 남편은 무슨 의미일까?’, ‘사 년여에 걸쳐 목 아프게 해오신 몸의 신학을 마감하시려는 교황님께서는 뭐라고 하실까?’ 궁금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하려는 주제는 1968년 공포된 회칙 “인간 생명”(Humane Vitae, 이하 HV)을 옹호하며 펼치시는 책임있는 부모, 윤리적인 수태조절, 악행으로서의 인공피임에 대한 가르침이며 거기에 교황님의 혼인영성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핵심 원리 : 부부행위가 지닌 일치 의의와 출산 의의 그리고 두 의의들 간의 불가분리성

 

‘신성한 계획 속에서 인간적 사랑’으로서 성경을 다시 읽어낸‘몸의 신학’의 기나긴 여정을 이제 교황님께서는 HV를 인용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하십니다. 곧 “…교회는 자연법을 해석하며 변함없이 자연법을 지키도록 사람들을 권고하여, 어떠한 부부 행위든지 인간 생명의 출산을 향한 본질적인 관계를 필히 유지해야 {인간 생명을 출산할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HV, 11항)라는 대목에서 자연법의 원리로서 출산을 지향하는 부부행위의 본성을 제시하시고, “이런 교리는 일치의 의의와 출산의 의의를 결부시키는 불가분의 연관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두 가지 의의는 모두 부부행위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므로 인간이 고의로 이것을 파괴할 수는 없다.”(HV, 12항)는 것에서 신법의 원리로서 부부의 일치 행위와 출산 행위가 지닌 불가분리성을 또한 제시해 주십니다. 교황님에 따르면, 혼인 당사자들이 진리로 읽어낸 몸의 언어를 바탕으로 성사의 전례적인 표징을 “일생 동안” 집행해 가는 가운데 연속되는 행위로서 그런 두 의의는 올바른 양심 안에서 인간 본성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법, 곧 “자연법”으로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부부 사랑과 생명 전달의 책임을 조화시키는 행동 방식’에 대해 이렇게 선언해 줍니다.

 

“…순수한 의향이나 동기 평가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 그 도덕성은 인간의 본성과 그 행위의 본질에서 이끌어낼 객관적 기준, 곧 참사랑이라는 맥락 안에서 상호 증여와 인간 출산의 온전한 의미를 보전하는 그러한 기준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 이 원칙을 지켜야 할 교회의 자녀들은 산아조절을 할 때에 하느님 법을 해석하는 교도권이 배척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사목헌장, 51항).

 

다시 말해, 부부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개인적 의향이나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아니라, 참사랑으로 상호 증여와 출산의 의미를 얼마나 온전히 반영하는지 그리고 교도권이 권고한 방법의 사용 여부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책임있는 부모가 되는 방법 : 하느님의 신성한 계획에 순응하며 자연적인 수태조절 실천

 

교황님의 설명에 따르면, 부부 사랑의 권리와 생명 전달의 의무가 상충될 때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은 ‘필요한 지배’를 하며 ‘윤리 원칙을 지키면서 자녀의 수를 너그럽게 결정하는 사람’을 의미(HV, 10항 참조)합니다.

 

수태조절이 필요한 경우에도 “생식 능력에 내재하는 자연 주기를 이용하여 불임기에만 부부행위를 하며”(HV, 16항) 언제나 ‘하느님의 신성한 계획에 순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HV, 10항 참조).

 

 

자연피임과 인공피임 간의 본질적 차이점

 

‘직접적인 단종이나 부부행위 전후 또는 중간에 피임을 목적으로 방법을 강구하는 모든 행위’(HV, 14항 참조)로서의 인공피임과 불임기를 이용한 자연피임은 둘 모두가 임신을 피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행위이지만,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교황님에 따르면, 인공피임은 ‘자연의 힘에 대한 지배’의 표현이어서 인격을 표현하는 자신의 몸이 ‘조작의 대상’이 되기에 인격의 파괴가 동반됩니다.

 

반면, 자연피임은 ‘자신에 대한 지배’의 표현이며 인격을 표현하는 몸 자체가 ‘조작의 주체’이며 ‘지배의 주체’가 되기에 인격의 존엄성이 보존됩니다. 자연적인 인격적 행위가 도덕적 정당성에 근거가 되기에 그 인격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인 몸의 동작이나 몸의 언어도 객관적 도덕 규범에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을 가진 몸을 스스로 지배함으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계획 곧 자신을 온전히 지배함으로써 서로에게 자기 - 선물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한 몸’이 되는 친교를 이룰 진리를 구현할 그런 계획을 미리 드러내줄 성사적인 표징을 갖추어야 하는 것, 그것이 지켜낼 객관적 규범인 것입니다.

 

잠재적 생식력을 인공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잠재적 생식력을 지닌 자신의 몸이 지닌 자기 - 지배를 통해 온전히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한 몸’이 되는 친교를 이룰 진리를 근본적으로 방해하는 행위이기에, “인격의 참된 질서 속에 뿌리내린 부부 친교를 그렇게 침범하는 것은 피임행위가 지닌 본질적인 악행이 된다.”(TOB 123:7)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교황님께서는 특별히 부부행위에 대해 HV가 기대고 있는 ‘자연법’의 개념에 대해 나름의 설명을 주십니다. 곧 “자연적인 수태조절”을 도덕적인 올바른 조절법이라고 부르면서 이런 조절 행위를 ‘자연법’과 합치된다고 보시는데, 그 이유는 그런 생물학적 질서를 인식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올바른 이성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연적인 수태조절을 실천하는데 표현되는 덕의 특성은 비인격적인 자연법을 향한 충실성에서보다는 그런 자연법 속에서 드러난 질서의 주인이며 원천이신 창조주 - 위격을 향한 충실성에서 더 많이 규정된다고 보십니다.

 

그러므로 자연법을 비이성적인 자연의 질서에서 곧 창조주의 계획에서 분리된 단순한 생물학적 규칙만으로 축소시켜 버림으로써 HV가 지닌 사상을 ‘불구’로 만들지 않도록 당부하십니다. 이 대목은 아마도, HV가 내린 윤리적 결정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반론으로 여겨집니다(81쪽 각주 참조).

 

 

현대인에 대한 사목적 배려

 

교황님께서는 이런 핵심 원리가 성경의 계시가 직접 문자로 알려주지 않지만 몸의 진리를 찾는 인간 이성에게 합치되고 교회 교도권이 지속적으로 해석해 온 자연 계시로서의 자연법적 가치도 지니고 있기에, 성서 계시 전체를 더 잘 이해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맥락이 그동안 신학적으로나 사목적으로나 요청되었던 바, ‘몸의 신학’이 그런 새로운 맥락을 제공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아울러, 교황님의 사목적 배려는 “틀림없이 많은 사람에게 지키기 어렵고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HV, 20항) 생물학적 규칙에 대해서도 미칩니다. “이 문헌은 확실히 생물학적 규칙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유능한 사람들이 규칙을 연구하고 더욱 심오한 방식으로 계속 응용하도록 권고합니다”(TOB 124:6).  그래서 우리 신자부부들에게 친숙한 기초체온법과 점액관찰법 등을 통해 더 정확한 자연주기를 알아내게도 된 것입니다.

 

 

혼인영성의 개요

 

HV가 제시하는 책임있는 부성과 모성을 단순한 생물학적 수태주기로 축소시킨 것으로만 본 사람들은 “확실히 그 회칙을 틀린 방식으로 읽어내었고 해석했다.”(TOB 126:3)고 교황님은 지적하십니다. 동시에 HV가 제시하는 “부부의 고유의 성소”(HV, 25항)의 삶을 정립하여 “부부와 가정의 영성”, “혼인 성소의 영성”을 그려내고자 하십니다.

 

교황님에 따르면, 혼인 - 부부 영성의 힘은 ‘성사적인 축복’을 통해 ‘내세의 삶에 대한 의식’ 속에서 ‘성령의 사랑’ 안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기도 안에서 ‘신적인 도우심’, 성찬례와 속죄성사에서 은총과 사랑이 혼인생활과 가정생활의 영성을 위해서는 “무류적이고 불가피한 수단들”(TOB 126:5)인 것입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교황님께서 “불임기에 상호적 사랑을 표현하고 서로를 향한 충실성을 보호해 줄 부부애무{불임기에 부부애의 증거와 약속한 신의를 지키기 위한 부부행위}”(HV, 16항)에 대한 언급에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점입니다.

 

교황님께서는 HV의 우리말 번역도 ‘부부행위’로 오역을 할 정도로 간단하게 짚고 넘어간 ‘부부애무’를 지목하시면서 하나의 부부행위로서 “애정의 표현들”을 다양하게 체험하도록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사목적 관심의 대상으로서 생물학적 규칙을 연구해 더 정확한 가임기를 알아내도록 촉구하신 대목과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대목일 것입니다.

 

 

마감하며

 

서두에서 인용한 동시에서, 아이가 부모의 거울이라고 보면, 그 집의 문제는 그 아내의 문제, 부부의 문제일 것입니다.

 

아이를 이뻐해 줄 때, 냉장고에 맛있는 것을 채워줄 때, 아이를 낳고 먹이는 공동 협력자로서 남편의 존재와 몫을 깜빡 잊어버린 그 아내에게서, 에덴동산 전체의 운명이 걸려있는 선악과를 따먹도록 뱀이 유혹할 때 공동 책임자인 남편 아담과 상의 한마디도 없이 혼자 덜컥 결정해 버린 하와(창세 3,6 참조)의 유전자를 읽어내는 것은 무리일까요?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하도록 배운 그 아내(에페 5,24 참조)의 모습에서, 자신도 사흘 동안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며 애태웠지만 자신보다는 남편이 상한 속을 먼저 내세우는 성모 마리아(루카 2,48 참조)의 모범을 읽어낼 수는 없을까요?

 

전자의 경우에는 “좋은” 엄마가 자신의 가정에서 아빠의 존재를 없애버림으로써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고, 남편의 자리를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미혼모’가 된 ‘행실이 나쁜’ 여인으로 전락합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방 하나를 못 구해 외양간에서 출산하게 한 ‘무능한’ 남자(루카 2,7 참조)가 이집트에서 망명생활 때는 ‘든든한’ 남편(마태 2,14 이하 참조)으로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성전에 봉헌하는 ‘책임있는’ 아버지(루카 2,22 참조)로 거듭 변화됩니다. 아내의 순명 하나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그 가정의 운명이 벌어집니다.

 

지난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또 다른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설문조사한 결과, 한 달 평균 아버지와 자녀의 대화 시간(전화통화 포함)이 30분 미만이라는 응답이 전체의 88.2%나 차지했는데, 그렇게 짧은 이유가 ‘어색한 대화’ 그리고 ‘통하지 않는 말’ 응답이 83%나 되었답니다. 아버지들의 개인적인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알맞은 협력자”(창세 2,20)인 어머니의 필요성 때문임을 빨리 눈치 채야 하겠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그 동시를 이렇게 바꾸고 싶으실 것입니다.

 

“아빠가 있어서 좋다. 엄마를 사랑해 주어서.  / 엄마가 있어서 좋다. 아빠가 순명을 받을 수 있어서.  / 아빠와 엄마가 있어서 좋다. 내가 생기게 해주어서.  / 내가 있어서 좋다. 아빠엄마가 창조 때의 그 복을 누리게 해주어서.  / 이제 강아지는 없어도 되겠다….”

 

끝까지 읽어주심에 깊이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 “목적”(end)이란 단어는 HV의 우리말 번역이 범한 명백한 오역이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지향”(ordained toward)으로 바꾸어 “혼인과 부부 사랑은 그 본질상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한다.”(사목헌장, 50항)라고 가르친다. 부부행위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이것은 매우 중대하고 민감한 변화인 것이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자연법의 원리 중 하나로 간주해 부부행위의 ‘목적’이 자녀 출산과 교육이라는 점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HV가 인용하고 있는 비오 11세 교황의 회칙 “Casti Connubii(정결한 혼인)”(1930. 12. 31.)의 본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1917년 비오 - 베네딕토 교회법이며 거기에는 그 ‘목적들’뿐만 아니라 그것들 간의 ‘순서’까지도 명백하게 규정된 바 있다. “혼인의 제일 목적은 자녀의 출산과 양육이며 제이 목적은 부부간의 상호부조 및 정욕 진화이다”(제1013조 1항). 물론 1983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회법에서는 그런 목적들과 순서를 삭제해 버렸다. “혼인 서약은 이로써 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 그 본연의 성질상 그 부부의 선익과 자녀의 출산 및 교육을 지향하는 평생 공동운명체를 이루는 바…”(제1055조 1항).

 

교회가 전통적으로 고수했던, 혼인행위의 ‘목적’을 자녀 출산과 교육으로 보는 그런 자연법의 원리를 부정하며 HV가 공포된 바로 다음날 7월 30일자 ‘뉴욕 타임즈’에 200여 명의 가톨릭 신학자들의 서명과 함께 미국 가톨릭 대학교 신학부 교수인 큐란(Charles Curran) 신부의 주동으로 ‘성명서’가 나왔다. HV의 윤리적 결론들이 ‘부적절한 자연법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것이다. 비록 HV가 ‘권위적이지만 무류적인 것이 아닌’ 교도권의 가르침이지만, 그로 인해 교도권의 권위는 상당한 타격을 입은 바 있다(랄프 맥키너니, “현대 가톨릭의 위기 진단”, 54-55쪽 참조).

 

* 이동호 프란치스코 - 신부, 가톨릭 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 부원장.

 

[경향잡지, 2010년 12월호, 이동호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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