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구상 요한 세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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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4-19 ㅣ No.68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15) 구상 요한 세례자 (상)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 구상 시인… 자유로운 창작 위해 월남

 

 

구상 시인

 

 

가을 냄새가 나는 시인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구상(요한 세례자, 具常, 1919~2004)의 시 ‘오늘’이다. 나는 예전에 경북 왜관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렉시오디비나(聖讀) 피정에 참가했었다. 가장 무더운 8월 초였다. 피정을 마치고 낙동강 변에 있는 구상문학관을 찾았다. 구도자적 삶을 산 시인이라 그의 예술세계가 궁금했다. 왜관은 구상이 6·25전쟁부터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산 곳이다. 문학관에 들어서자 맨 먼저 반긴 것은 조각상이었다. ‘시인의 명상’이란 청동상인데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그 옆에는 중광 스님이 재밌게 그린 구상의 얼굴 그림이 있었다. 다음으로 반갑게 만난 것은 구상이 종이에 직접 쓴 ‘꽃자리’라는 시였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이 시는 내가 힘들 때마다 따뜻하게 위로해주었다. 전시실에는 구상이 늘 쓰고 다녔던 중절모자, 안경, 돋보기, 만년필 그리고 묵주가 놓여 있었다. 문학관 뒤쪽으로 갔더니 낙동강을 배경으로 아담한 한옥 한 채가 있었다. ‘관수제(觀水齊)’였다. ‘물을 관조하는 곳’이다.

 

구상과 강의 인연은 깊다. 그의 고향인 함경남도 원산 근교의 덕원은 적전강이 흐르는 곳이다. 젊은 시절, 그 강에서 생각을 키웠다. 6·25전쟁 후에는 낙동강이 흐르는 왜관에 정착해 그 강을 바라보며 스무 해 넘게 살았다. 그리고 서울로 이사해서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강이 흐르는 여의도에 살았다. 이렇듯 강은 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강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썼다. 대표적인 시가 ‘그리스도 폴’이다. 구상은 그리스도 폴 성인의 삶을 닮고 싶었다. ‘강’이라는 일터와 ‘남을 업는다’는 것이 좋아 그리스도 폴을 주보 성인으로 삼았다.

 

- 덕원수도원과 덕원신학교(아래) 전경.

 

 

신학교 입학과 자퇴

 

구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흰 턱수염과 잿빛 두루마기, 중절모와 지팡이이다. 그래서 어떤 수필가는 구상에게 ‘가을 냄새’가 난다고 했다. 구상의 본명은 구상준(具常浚)이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상아, 상아’ 부르다 보니 외자 이름이 되었다. 구상의 형제는 여럿 있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 많이 죽고 큰형은 일본 유학 중에 관동대지진으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래서 남은 형제는 둘째 형 구대준과 구상뿐이었다. 부친은 백동성당(현 혜화동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구대준은 수도원 부설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수도회가 원산교구를 관장하면서 신학교도 덕원으로 이전해 가게 되었다. 덕원에 수도원이 완공되었고, 신학교도 건립되었다. 구상 가족 모두는 덕원으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덕원은 구상의 두번째 고향이 되었다. 구상은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부모는 두 아들 모두 신학생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구상은 신학교에 3년 다니다가 자퇴했다. 가족들의 실망은 매우 컸다. 사제가 되기 위해선 최소 13년의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자유분방했던 구상은 그러한 신학 교육이 답답했다. 서울로 가서 동성상업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또 자퇴하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에서 노동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일본대학 종교과와 명치대학 문예과에 응시했다. 두 곳 모두 합격했다. 선택한 곳은 일본대학 종교과였다. 문학보다는 철학에 관심이 컸다. 교육과정은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 많았다. 교수진도 승려였다. 후에 구상이 쓴 글에 불교 용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유학 당시에 배운 불교 사상 때문이다. 구상은 가톨릭과 불교를 연결하려고 애썼다. 예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 선사가 입적했을 때, 노기남 대주교가 조문하고 수녀들이 연도를 올렸다. 구상은 이 모습에 감동해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산비탈 무밭에 핀 들국화모양/ 스님들과 그 독경 틈에 끼여/ 한 무리의 가톨릭 수녀들이/ 효봉 스님 영전에 꿇어서/연도의 합송을 하고 있다… 이 어쩐 축복된 광경인가?/ 이 어쩐 눈부신 신이(神異)런가?/ 서로가 이단과 외도로 배척하여/ 서로가 미신과 사도라고 반목하며/ 서로가 사갈(蛇蝎)처럼 여기는 두 신앙/ 이제사 열었구나, 유무상통(有無相通)의 문을!”(‘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70’에서)

 

귀국 후, 구상은 함흥에 있는 총독부 기관지 ‘북선매일신문’에 기자로 취직했다. 일제가 인정하는 기관에서 일해야 학병이나 강제징용에 끌려가지 않았다. 이때 흥남질소비료공장 간부 사택에서 살인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이 잡혀 구상은 기사를 쓰게 되었다. 범인의 모습과 태도를 온갖 수식어를 사용해 흉측하게 써서 데스크로 넘겼다. 그런데 기사를 훑어본 사회부장이 “기자는 말이야,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는 경찰의 편이지만 잡히고 나면 범인의 편인거야.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해선 안돼!”라고 했다. 구상은 그 말이 성서의 ‘간음한 여인’ 대목보다도 더 직접적인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다. 구상은 기자 생활을 “식민지 어용신문의 기자가 되어 용왕 앞의 토끼처럼 쓸개는 떼어놓고 날마다 성전송(聖戰頌)과 공출 독려문을 써댔다”고 자책했다.

 

기자 생활 중에 약혼했다. 상대 여인은 형 구대준 신부가 사목하는 흥남성당 부설 대건의원 의사 서영옥이었다. 그때 폐결핵이 발병했다. 폐결핵은 당시 치료제가 없어 죽는 병이었다. 구상은 마식령 너머에 있는 마전리의 수도원 산장으로 들어가 열 달 동안 요양했다. 그때 쓴 시가 ‘소야곡’이다. “묘석인 듯 싸느랗게 질린 종이 위에 이 밤도 달빛을 갈아 나의 비명을 새기노라…” 얼마나 절망적인지 첫 문장에서 싸늘한 죽음을 느낄 수 있다. 건강이 회복되자 구상과 서영옥은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쓰고 그레고리오 성가가 울려 퍼지는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 이중섭 화백 작 '구상네 가족'.

 

 

이중섭과 구상

 

해방이 되자 남으로 내려왔다. 이유는 「응향(凝香)」이란 시집 때문이었다. 북에는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원산문학가동맹’은 해방을 기념하는 시집을 발간했다. 구상은 그 시집에 시 세 편을 썼다. 「응향」에 실린 시들은 이념시가 아니라 순수시였다. 평양에서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인민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퇴폐적인 시라고 비판했다. 현장 검열과 함께 자아비판이 이어졌다. 구상은 위조 증명서를 만들어 한겨울에 38선을 넘었다. 그러다가 경비병에게 체포되어 감옥에서 추위와 허기에 시달렸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재래식 변소 밑으로 내려가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는 간신히 서울에 도착했다. 빈손으로 내려왔기에 밀가루 수제비로 끼니를 때웠고 시멘트 포대를 덮고 잤다. 남한에서 구상은 공산주의를 반대한 ‘반공 시인’으로 불렸다.

 

결핵이 재발했다. 병과 함께 가난도 엄습했다. 아내가 제안했다. 마산요양원에 자신은 의사로 가고 구상은 환자로 입원하자는 것이었다. 아내 말대로 마산요양원으로 내려갔다.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그때 도움을 준 사람이 시인 설창수였다. 그는 구상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해당화 피는 원산에서 공산당들에게 시를 쓴 죄로 결정서와 박해를 받고 월남 탈출하여 사고무친한 자유 남한에서 해당화 같은 피를 쏟으며 고독하게 쓰러진 시인 구상을 구출하자”라는 글을 돌렸다. 구상은 그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일을 계기로 설창수와 의형제를 맺었다.

 

그리고 잊지 못할 사람으로 공초 오상순을 들 수 있다. 오상순은 일본 도시샤대학 종교철학과를 나온 시인이다. 사람들을 만나면 늘 “반갑고 기쁘고 고맙다. 네가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다”라는 희망적인 말을 건넸다. 그래서 구상의 그 유명한 ‘꽃자리’란 시가 탄생했다. 구상은 오상순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또한, 구상의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 이중섭을 들 수 있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났다. 구상은 이중섭을 처음 만났을 때, 프랑스 화가 루오의 그림에 등장하는 예수의 얼굴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중섭 역시 구상이 루오의 예수 얼굴을 닮았다고 느꼈다. 두 사람의 생각이 같았다. 이중섭이 귀국 후 원산에 정착했을 때 아이가 죽었다. 구상은 이중섭과 함께 아이의 관을 들었고 아이를 땅에 묻었다. 구상은 가족과 떨어져 비참하게 사는 이중섭을 보살피기 위해 왜관 집 옆에 방을 얻어주었다. 이중섭은 그 고마움으로 ‘구상네 가족’이란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

 

구상에게 결핵이 또 재발했다. 구상은 ‘검은 장밋빛 피를 몇 양푼이나 토하고 시신처럼’ 누워 지내야만 했다. 이중섭이 그림 한 점을 가져왔다. 큰 복숭아 속에 어린이가 청개구리와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중섭은 구상에게 그림을 주면서 “복숭아, 천도복숭아 님자 상이, 우리 구상이 이걸 먹고 요걸 먹고 어이 빨리 나으란 그 말씀이지”라고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4월 16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16) 구상 요한 세례자 (하)


소외된 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간 시인 구상

 

 

구상은 걸레 스님 중광 등 시대의 아웃사이더 기인들과 친분이 깊었다. 사진 왼쪽부터 중광, 한국박물관협회 회장 김종규, 구상, 혜련 스님.

 

 

구상과 각하 박첨지

 

6ㆍ25 전쟁이 일어났다. 구상(요한 세례자, 具常, 1919~2004)은 육군종군작가단에 소속되었다. 서울 수복 때에는 정훈국 선발대에 합류했다. 승리일보를 만들어 서울 시민에게 뿌렸다. 국군은 계속 북진했다. 북진을 따라가면 원산에 계신 어머니를 모셔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신문을 만드느라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구상은 이 일을 평생 후회했다. 형 구대준 신부는 전쟁 전에 덕원수도원을 지키다가 다른 신부들과 함께 공산당에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정부는 서울로 환도했다. 구상은 경상북도 왜관에 정착했다. 왜관을 선택한 이유는 덕원수도원이 왜관에 수도원을 건립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원수도원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추억이 구상을 왜관으로 오게 한 것이다. 수도원 근처에 집 한 채를 샀다. 부인은 순심의원을 개업했다. 왜관에서 대구 영남일보사로 출근했고 효성여대로 강의도 나갔다. 결핵이 또 재발했다. 피를 토해냈다. 천식까지 겹쳤다. 부인은 서둘러 구상을 일본 도쿄 인근에 있는 결핵 전문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곳에서 갈비뼈 6대를 자르고 폐를 꺼내 절개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귀국 후에 구상은 군사정권에 대해 날 선 비판을 했다. 우정을 나누었던 박정희가 독재자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그 실망을 시로 표현했다.

 

“그는 샤먼이 되어있었다 / 그 장하던 의기가 / 돈키호테의 광기로 변하고 / 그 질박하던 성정이 / 방자로 바뀌어 있었다.”

 

박정희와는 5·16 군사 쿠데타 전부터 의기투합하는 사이였다. 쿠데타 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 자리를 권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 병원에서 폐수술 할 때 치료비에 보태쓰라고 상당 액수의 돈을 보내오기도 했다. 구상은 그러한 박정희를 ‘각하’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냥 ‘박첨지’라고 불렀다.

 

 

사회적 약자의 벗으로

 

구상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기도로 했다. 그의 시 ‘새해’에서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기도는 나의 일과의 처음과 끝이다”라고 했다. 구상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드렸다. 몸이 아플 때도,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고통스러울 때도 기도를 드렸다. 문우(文友)들과 어울려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잠들었어도 그 다음 날에는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미사를 봉헌하러 갔다. 이렇듯 구상은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따뜻하고 훈훈한 일화가 있다. 명동대성당 입구에 뇌성마비로 전신이 비틀린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는 상자를 앞에 놓고 오가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구걸했다. 구상은 성당에 올 때마다 그 사람에게 적선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친구가 되었다. 어느덧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서로가 낯익고 친숙해져 멀리서 구상의 얼굴만 보아도 반갑다고 혀 꼬부라진 소리를 지르곤 했다. 어느 날은 그가 주스 한 병을 건넸다. 또 어느 날은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있다가 비틀어진 팔과 꼬인 손으로 꽃을 내밀었다. 구상은 그 우정에 어떻게 화답할 줄 몰라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성당으로 들어갔다.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장미꽃을 받들고는 기도했다. “하느님! 당신의 영원한 동산에서는 저 사람과 제가 허물을 벗은 털벌레처럼 나비가 되어 함께 날게 하소서!” 구상은 뇌성마비 친구가 건넨 선물에 기도로 화답한 것이다.

 

그리고 살인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15년째 옥살이하는 사람을 양아들로 삼았다. 사형 집행만 남은 사람이었다. 그를 구하기 위해 한 스님과 백방 노력했다. 그 결과, ‘무기’로 감형되었다. 이 사건은 드라마로 방영되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또한, 구상은 북한에서 투옥되어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대준 신부의 사제 서품 40주년을 맞아 기념 미사를 봉헌하고 싶었다. 그래서 예전에 이중섭에게 받은 그림을 호암미술관에 넘기고 사례비로 1억 원을 받아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미사 예물로 봉헌했다.

 

- 칠순의 나이를 살며 구상은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정권의 표적이 되다

 

구상은 기질적으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자유당 정권 말기에 구상의 일생에서 가장 억울한 사건이 벌어졌다. 일명 ‘레이더 사건’이다. 국가보안법 파동이 일어났다. 야당에서는 외곽조직으로 민권수호국민총연맹을 만들어 대항했다. 구상은 그 조직의 문화부장을 맡았다. 그래서 데모에 앞장서고, 집회의 연사로 나갔다. 이렇게 되자 구상은 정권의 타깃이 되었다.

 

구상을 없애려고 갖은 조사를 다 했으나 밝혀진 것은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레이더 사건’이었다. 구상과 친한 A가 있었다. 그의 사위는 도쿄대학에서 연구 중이었다. 실험에 쓸 진공관이 필요했다. 사위는 장인(A)에게 진공관을 부탁했다. A는 남대문시장에서 진공관을 구해 일본으로 보내주었다. 사위는 진공관이 더 필요하다고 연락했다. A는 시장 상인에게 선금을 주고 진공관을 부탁했다. 그런데 돈을 떼이고 말았다. 구상은 A로부터 딱한 사정을 듣고 잘 아는 사람에게 돈을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 일이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로 둔갑했다.

 

관련된 사람 모두 한국군 통신장비인 레이더 진공관을 일본을 통해 북한으로 몰래 보내려 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구상은 1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여섯 달을 살았다. 억울함을 재판장에게 호소했다.

 

“내가 만일 조국을 팔았다면 또 그 손에 놀아났다면 재판장님! 징역이 아니라 사형을 내려 주십시오. 조국을 모반한 치욕을 쓰고 15년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목숨을 구차히 이어 가느니보다 죽음이 차라리 편안합니다.… 재판장님! 무죄가 아니면 진정, 사형을 내려 주십시오.”

 

재판장은 구상의 억울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 2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시인의 임종 고백

 

폐결핵을 앓던 둘째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 구상은 자신의 병이 아들에게 옮아 죽은 것이라고 자책했다. 그 후로 아내를 잃고, 큰아들도 폐렴으로 잃었다. 또한, 큰 교통사고를 두 번씩이나 당했다. 그 후유증으로 육체적 고통을 많이 받았다. 고질병인 천식이 호흡곤란으로 이어졌으며, 당뇨와 눈의 망막염 그리고 전립선 질환까지 그를 괴롭혔다. 특히 당뇨가 심했는데 인슐린 주사를 맞을 정도였다. 결국 구상은 합병증으로 여의도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 미사는 명동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거행되었다. 미사에는 시인, 소설가, 화가, 기자, 신부, 수녀, 수사, 스님, 장애인, 전과자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구상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시인 고은의 말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구상은 ‘임종 고백’이란 시를 남겼다.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 속이며 살아왔다 / 이는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게 / 무엇보다도 두려워서였다.… 더구나 평생 시 쓴답시고 / 기어(綺語)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나는 / 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 / 저런 추악 망측한 나의 참모습과 /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 하느님, 맙소사!”

 

참고자료 : ▲ 구상, 「영원 속의 오늘」, 중앙출판공사, 1975. ▲ 구상, 「그분이 홀로서 가듯(具常詩文選)」, 홍성사, 1981. ▲ 구상, 「나는 혼자서 알아낸다」(한국대표명시선100), 시인생각, 2013. ▲ 이숭원, 「구상평전」, 분도출판사, 2019. ▲ 구상문학관 홈페이지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4월 23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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