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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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7: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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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21 ㅣ No.1571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7)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남편 최경환의 죽음에 흔들렸으나 ‘영광스러운 순교’ 선택

 

 

- 심순화 작 ‘이성례 마리아’.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보다 어머니인 이성례(마리아) 복녀가 신자들 사이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옥중에서 젖먹이 막내가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배교했다가 다시 순교를 자청했던 그녀와, 어머니를 고통 없이 단칼에 베어 달라며 휘광이(망나니)에게 동냥한 돈 몇 푼과 쌀을 전하는 네 아들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집에서 어머니를 소개하는 내용이 딱 한 편 있다(1851년 10월 15일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최양업 신부 부모에 관한 이야기는 이만 줄인다.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조선의 저명한 경주 이씨 가문에서 출생했다. 이 가문에서 유명 인사를 여럿 배출했다. 그중 한 분이 단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다. 그의 집안 딸들에게서 2명의 사제가 탄생했다. 그의 딸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조모이고, 어머니 이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다.

 

이 마리아는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했는데 18세에 프란치스코와 혼인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을 거듭했는데도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 갈 때나 먼 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릴 때면 예수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던 이야기,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 줬다. 그는 남편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데도 남편을 공경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화목하게 살았다.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남편을 여의고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1893년 포졸들이 집을 덮쳤을 때 조금도 소란을 피우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해 포졸들을 먹였다. 서울에 도착한 마리아는 남편과 큰 자식들과 격리돼 여인들만 있는 감방에 갓 난 아들과 함께 갇혔다. 다음날 팔다리가 으스러지고 곤봉에 찢겼으나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증언했다. 

 

그에게 가장 큰마음의 고통은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였다. 갓난아기는 젖을 달라고 하는데 젖이 안 나와 엄마의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남편 최경환)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줄곧 꿋꿋이 버텼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죽고 또 어린 것이 더러운 감방에 축 늘어져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마리아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곤장과 칼 앞에서도 용맹했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졌다. 그래서 살덩이와 핏덩어리들이 흩어져 있는 감옥에서 마리아는 마음과는 달리 거짓말로 배교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다시 구제하는 은혜를 주셨다. 마리아가 풀려나 집에 가 있는 동안 그의 맏아들 최양업 토마스가 마카오에 보내졌다는 사실이 탄로 났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상급 재판소인 형조로 이송됐다. 거기서 마리아는 신자에게 순교 권고를 듣고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판관 앞에서 배교를 용감히 취소했다. 재판소에서 마리아는 자기의 갓난아기가 기아로 죽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두 아들(양업과 갓난아기)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했다. 

 

최양업의 첫째 동생(최의정, 당시 15세) 야고보는 한 달 이상 감옥에 머물면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갇힌 포로들을 위해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죽는 날까지 지켜보면서 증인이 됐다. 마리아는 형조에서 세 차례 고문을 당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날이 가까워져 오자 평온한 모습으로 야고보를 불러 마지막 훈계를 했다.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도록 타일렀다. 

 

사형 집행일, 마리아는 기도를 마치고 난 후 야고보에게 어머니를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형장에 따라오지 말고 떠나라고 명했다. 야고보는 고아로 남겨질 어린 세 동생(선정 안드레아 12세, 우정 바실리오 9세, 신정 델레신포로 6세)을 거느리고 살아야 할 처지였다. 마리아는 형장에서 야고보의 모습을 보고 그 순간 모정에 끌려 마음이 허약해지고 흔들려, 최후의 전투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덜 된 모습을 남에게 보여줄까 봐 두려웠다. 야고보는 어머니에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자고 작별 인사를 하고 감옥에서 나왔다. 

 

마리아는 다른 6명의 교우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휘광이의 칼을 받고 1840년 1월 31일 39세로 순교했다.

 

 

당고개 성지

 

이성례는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했다. 오늘날 서울 용산 청파로 139-26에 자리한 당고개 성지<사진>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서울에서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이 탄생한 순교성지이다. 

 

당고개는 원래 신자들의 처형지가 아니었다. 설을 앞둔 상인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처형지를 옮겨 달라고 요청해 한강 가로 조금 나간 당고개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것이다. 

 

이곳에서 1839년 12월 27일(음력)부터 이틀간 이성례를 비롯한 10명이 순교한다. 이들 중 한 차례 배교했던 이성례만 제외하고 모두가 1925년 7월 5일 시복됐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이성례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시복됐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21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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