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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보속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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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28

보속이란 무엇인가?

 

 

머리말

 

2000년 대희년을 맞아 희년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빚 탕감과 용서와 화해가 강조되면서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특별히 현대인들은 죄라는 단어 자체를 듣기 거북해 하며, 기피하는 경향마저 있다. 성당에만 가면 항상 “죄(罪), 죄” 하기 때문에 성당에 가기 싫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신부들은 미사를 집전하면서 참회 예절 때 ‘죄’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우리 허물을’ 또는 ‘잘못을’ 반성합시다”라고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다.

 

많은 이들이 죄를 짓고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거나 법정에 서게 되면, “나보다 몇 배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멀쩡한데 나만 재수 없이 걸려서 …” 하는 태도를 보인다. 생각해 보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죄는 넘쳐 나는데 죄의식이 없는 시대가 바로 우리 시대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죄에 대한 집단 불감증’에 깊이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문명 비평가들은 이 ‘죄의식의 실종’이 바로 이 시대의 커다란 문제점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죄를 범하고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죄의식이 없다면 참된 뉘우침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고해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도 기대할 수 없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거듭 떨어지는 모든 죄와 악에서 우리 자신을 나날이 새롭게 하고 이웃과 하느님과 화해함으로써 하느님과 은총 관계를 회복하고, 회복된 은총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고해성사를 권유해 왔고, 특별히 한국 교회는 부활과 성탄을 준비하는 판공성사를 실시해 왔다. 세례 후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고해성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하다.

 

이런 비유도 있다. “고해성사는 구원의 두 번째 널빤지라고 할 수 있다. 바다를 건너는 사람에게는 조각배를 보존할 필요가 있거나, 또는 조각배가 파선되었다면 널빤지 한 조각을 붙잡고 매달려야 하는 것이 필요하듯이 세례성사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일이나 또는 고해성사라는 널빤지를 붙잡고 매달리는 일이 필요하다.”1)

 

구원을 받으려면 세례로 받은 은총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죄를 지어 파산당했다면, 고해성사로 죄를 용서받고 은총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고 널빤지 하나를 붙잡고 매달리는 것과 같다는 설명이다. 인간이 죄를 피할 수 없다면, 고해성사는 구원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이다.

 

고해성사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찰(반성), 통회(뉘우침), 정개(결심), 고명(고백), 보속 등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보속에 관한 것으로 보속의 의미, 보속의 필요성과 기능, 보속의 역사, 보속의 종류, 합당한 보속, 보속의 개인적 사회적 차원 등에 관해서 살피고자 한다.

 

 

1. 보속의 가능성과 의미

 

현대인들은 “내가 이미 죄를 저질렀는데 어떻게 그 죄가 용서될 수 있으며, 그것을 기워 갚을 수 있겠는가?” 하며 ‘죄의 용서’와 ‘보속’의 가능성 그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정말 인간의 죄는 한 번 저질러지면, 엎질러진 물처럼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속(satisfactio)이란 말은 라틴어의 ‘satisficare’에서 유래하는 바, ‘충족하게 하다’, ‘만족하게 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물론 위대하신 하느님께 합당하게 만족을 드리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만큼 어느 정도 만족을 드리는 것은 가능하다. 인간의 편에서 그 나름대로 정의를 수행하는 양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충분하다.”2)

 

인간이 하느님께 합당하고 충분한 보상을 드릴 수는 없지만, 인간이 인간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보속을 다 한다면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께 대한 보상으로서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도 된다. 그러면 이제 보속은 어떤 성격을 가지는지 살펴보자.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보속은 덕의 한 가지 행위이다. 이는 사물과 사물 사이에 정의가 실현되는 동등성에 기준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보속은 정의의 덕의 한 가지 행위이며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 이전에 행한 모욕에 대한 보복적인 정의의 덕행이다.”3)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누구를 상심하게 하거나 손해를 끼쳤으면, 그 억울함이나 손해를 기워 갚을 것을 정의는 요구한다. 보속은 이 정의의 요구를 채우는 것이라는 말이다. 모든 죄는 그 자체로 벌을 요청하고 있다. 인간의 보편 양심은 어떤 죄를 보게 되면, 그 죄를 응징하는 벌을 내리고자 하는 자연적이고 양심적인 충동을 느낀다. 그 죄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법적 절차에 따라야 할 사안임에도, 마치 그 죄인을 응징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인 양 생각하며 분개하거나 흥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을 예로 들고자 한다.

 

필자가 진주 중학교에 다닐 때의 일로 기억한다. 그 때 필자는 시골에서 기차 통학을 하였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역으로 가기 위해 남강 다리를 건너는데 백사장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서 지켜보게 되었다. 그 당시 ‘춘우’라는 아이의 유괴 사건이 있었는데, 경찰에게 끌려 온 범인이 현장 검증을 하고 있었다. 유괴한 아이를 범인이 어디에 생매장하였는지 그 현장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범인의 진술에 따라 백사장 두 군데를 파헤쳤지만 시체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세 번째인가 팠을 때 생매장당한 아이의 사체가 나왔다. 그러자 백사장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저 놈을 죽여라’ 하면서 일시에 범인에게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막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범인은 그 자리에서 군중에게 맞아 죽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 양심이 요구하는 자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죄와 벌은 마치 원인과 결과처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총을 맞은 것에 비유한다면, 총알은 죄이고 그 상처는 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

 

그런데 벌은 죄의 경중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윤리 신학에서는 대죄(중죄, peccatum grave)와 소죄(peccatum veniale)를 구별하기도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대죄를 지으면 지옥의 영원한 벌[永罰]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이 회개하고 죄를 고백하면 대죄를 용서받고 영벌도 용서받지만, 그 죄 때문에 현세에서나 연옥에서 받아야 할 벌까지 다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이를 ‘영원한 지옥 벌’과 구별하여 잠벌(暫罰)5)이라고 한다. 잠벌은 영벌과 대칭되는 개념이다. 영원한 벌이 아니라, 잠시 당하는 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죄가 요구하는 벌을 채우는 것이 바로 보속이다.

 

사전적인 설명을 하자면, “넓은 의미로는 끼친 손해의 배상을 뜻하며, 그리스도교 신학에서의 보속은 지은 죄를 적절한 방법으로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좁은 의미의 보속(sacramental penance)은 고해성사의 구성 요소로서 고해 사제에 의하여 부과된 기도나 선행으로 구성되어 있다.”6)라고 말할 수 있다.

 

 

2. 보속의 필요성

 

많은 신자들이 고해성사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면 그만이지 왜 보속은 필요한가, 그리고 세례성사를 받으면 세례 받기 전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때의 모든 죄와 그 벌까지도 다 용서받는데, 고해성사로 죄를 용서받은 다음에도 왜 보속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비유로 설명하면, 총상을 입은 사람이 수술로 몸에 박힌 총알을 꺼내고 상처를 꿰매어 생명을 건지긴 했으나, 그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고 치료를 계속하여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차 올라야 하는 것과 같다. 고해성사가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고백함으로써 수술을 받은 것에 해당한다면, 보속은 그 상처를 아물게 하고 치유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7)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로마 2,6)라고 하셨다. 대죄에 대하여 지옥 벌이 있다면, 소죄나 미죄(微罪)에도 그에 따르는 벌이 있기에 이 잠벌을 보상하기 위해서 보속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영세하기 전에 지은 모든 죄(원죄와 자신이 지은 본죄)에 대해서는 죄의 용서와 그 벌까지도 다 용서받는다. 이는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때 지은 모든 죄에서 죽고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요한 3,5 참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므로 모든 죄와 그 벌은 다 용서받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온 세상의 죄 때문에 보속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함께 묻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어떤 보속도 부과되지 않는다.”8)라고 하였다. 그래서 교회는 “세례 전에 범한 죄는 세례성사로써 그 죄와 벌이 용서되지만(ipso facto) 영세 후에 범한 죄는 고해성사로써 용서된다. 그러나 그 죄의 벌까지도 다 용서되는 것이 아니고, 지옥 벌만 용서되고 잠벌은 남아 있게 된다.”9)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루터는 일찍이 “잠벌에 대한 보속이 필요 없다.”라고 주장했다. 교회는 이를 단죄했으며, 그리스도의 보속이 우리에게 실제로 적용되어 우리 구원의 일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당신들은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시오.”(마태 3,8)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씀대로 보속이 필요함을 역설했다.10) 그러므로 교회는 보속이 고해성사의 구성 요소(quasi materia)라고 말한다.11) 사도 바오로는 또 다른 차원에서 보속의 필요성을 역설하신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고통이 부족하다기보다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삶을 나의 것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성 아우구스티노는 “예수는 우리의 머리로서 온갖 수난을 다 받으셨지만, 그의 지체인 우리 안에서 아직도 수난을 받고 계신다.”12)라고 하셨다. 또한 파스칼은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세상 마칠 때까지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13)

 

 

3. 성서 안에서 보는 보속의 예

 

보속의 필요성에 관한 것이지만 이는 성서 안에서 죄를 용서받은 다음에 어떤 보속을 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보속이 단순히 교회법적인 명령이 아니라, 앞에서 본 세례자 요한의 “당신들은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시오.”(마태 3,3)라는 말씀 외에도 성서에는 보속을 명하는 예가 얼마든지 있음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 창세기 3,16-17:“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그리고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여기서 아담과 하와는 죄의 용서를 받고 은총의 상태는 회복되었지만, 죽음과 산고와 힘겨운 노동이라는 벌은 면할 수 없었다.

 

- 민수기 12,13-15:모세가 에디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해서 아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판하였다. 그러자 미리암은 주님께 벌을 받아 문둥병에 걸렸다.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었다. ‘하느님, 미리암을 고쳐 주십시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미리암의 얼굴에 아비가 침을 뱉었다면 부끄러워 이레 동안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 법 아니냐? 그러니 미리암을 진 바깥으로 내쫓았다가 이레가 지난 다음에 돌아오게 하여라.’ 미리암은 이레 동안 진 밖에 쫓겨 나가 있었다.”

 

이렇게 미리암은 죄를 용서받고도 주님께 벌을 받아 7일 동안 문둥 병자로 진 밖에서 지내야만 했다.

 

- 민수기 20,11-12:“모세는 아론과 함께 그 바위 앞에 회중을 불러모아 놓고 외쳤다. ‘반역자들아, 들어라.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 주랴?’ 그리고 나서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치니 물이 콸콸 터져 나왔다. 회중과 가축이 그 물을 마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꾸중하셨다. ‘너희는 나를 믿지 못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회중에게 줄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느님께서는 사막에서 목이 말라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의 청을 들어 주신다. 그러나 처음부터 하느님을 믿지 못한 불신 때문에 모세와 아아론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게 하신다.

 

- 사무엘 하 12,13-14:“‘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다윗이 이렇게 자기 죄를 고백하자 나단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분명 임금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임금님께서 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이 주님을 얕보셨으니, 우리야의 아내(바세바)가 낳게 될 아이는 죽을 것입니다.’”

 

나단 예언자가 주님의 뜻을 전하며 우리야의 아내를 범한 다윗을 규탄하자, 다윗이 뉘우치며 용서를 빈다. 하느님께서는 그 때 다윗의 죄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얻은 아들은 죽게 될 것임을 말한다.

 

- 다니엘 4,24:“임금님께서는 이제 소인이 드리는 의견을 기꺼이 받아들여 주십시오. 선을 베풀어 죄를 면하시고, 빈민을 구제하셔서 허물을 벗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길이 태평성대를 누리실 것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몽하면서 하느님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선을 베풀고, 빈민을 구제하는’ 보속을 하라고 명하고 있다.

 

- 요엘 2,12:“그러나 이제라도 주님의 말이다,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라. 단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어라.”

 

예언자는 인간이 회개하고 뉘우치며 단식(보속)함으로써 주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호소하고 계신다.

 

 

4. 보속의 의미와 기능

 

그러면 보속은 실제로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죄의 벌은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곧 응보 기능과, 예방 기능, 그리고 교정 기능이 그것이다. 그런데 현세에서 수행하는 보속은 이상의 세 가지 기능을 다 수행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내세의 벌은 응보 기능만을 수행함으로 정의의 요구를 채우는 것으로 볼 수 있다.”14)

 

여기서도 보속이 죄에 대한 보상과 죄를 예방하고 죄로 손상된 영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맺는 말

 

머리말에서 “죄는 넘쳐 나는데도 죄의식이 없는” 이 시대의 죄에 대한 불감증을 말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는 ‘쉽고 편한 것은 다 좋은 것이고, 어렵고 힘든 것은 다 나쁜 것’이라는 통념이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광범하게 퍼져 있는 실정이다. 죄의식이 실종되고, 힘든 것을 무조건 싫어하는 시대적 흐름은 ‘보속’에 대한 의미를 더욱 퇴색시키고 있다. 죄를 죄로 인식함으로써 그 죄를 뉘우치게 되고, 그 뉘우침이 보속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고해성사와 그 보속이 하느님의 은총 상태를 회복하는 계기도 되고 또한 우리 자신과 이 사회가 정화되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보속이 죄에 대한 응보의 기능뿐 아니라, 죄의 기회를 피하게 하는 예방 기능과 자신의 악습을 고치고, 습관적인 죄로 무감각하게 된 사람에게 악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하는 교정 기능도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이렇게 보속을 제대로 수행할 때, 고해성사로써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잠벌을 받지 않고, 영적인 힘을 되찾게 되므로 고해성사는 완성된다고 하겠다.

 

 

1) G. 달 사쏘 - R.꼬지 편찬,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요약], 이재룡, 이동익, 조규만 옮김, 1993년, 가톨릭 대학교 출판부, 491-492면. 

2) 위의 책, 511면. 

3) 위의 책, 510면. 

4) 제임스 C. 기본스, [교부들의 신앙], 장면 옮김, 가톨릭 출판사, 1979년(10판), 389면. 

5)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잠시 당하는 벌. 모든 범죄엔, 그에 상응한 벌이 따르게 마련이며, 그 벌은 현세에서나 내세의 연옥 또는 지옥에서 받아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지옥에서 당하는 벌은 영원히 지속되지만, 현세나 연옥에서 받는 벌은 유한하며 지옥의 ‘영원한 벌’에 비기면 ‘잠시의 벌’에 지나지 않으므로 ‘잠벌’이라 한다([한국 가톨릭 대사전], 1985년, 994면 참조). 

6) 한국 교회사 연구소 편, [한국 가톨릭 대사전] 5, 한국 교회사 연구소, 3460-3461면. 

7) 제임스 C. 기본스, 앞의 책, 189면 참조. 

8) G. 달 사쏘 - R. 꼬지, 앞의 책, 463면. 

9) Dz, 807.840.895.904.922 참조. 

10) Dz, 904.906.923 참조. 

11) Dz. 699 참조. 

12) PL, 36.731 참조. 

13) 배문한, “보속의 의미와 실천 방향”, [사목] 54호(1977.1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37-45면. 

14) G. 달 사쏘 - R. 꼬지, 앞의 책, 510-511면.

 

[사목 1999년 10월호, 유영봉(마산교구 해운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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