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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황심 토마스 - 북경 왕래한 믿음직한 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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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31

신유박해 순교자들 (37 · 끝) 황심 토마스


북경 왕래한 믿음직한 밀사

 

 

황사영은 그의 백서를 북경 주교께 전달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 일을 이미 1798년과 1799년 쇄마구인(刷馬驅人)의 명색으로 북경에 가서 주문모 신부의 서한을 구베아 주교께 전달했던 적이 있는 황심에게 맡기고자 했다. 황심은 부연사행의 말몰이꾼으로 자주 북경을 내왕하는 교우 옥천희와 연락하여 밀송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801년 초가을 옥천희가 국경에서 체포되고 그의 실토로 11월 1일 황심이 서울에서 검거 당했다.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여 교우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황심은 황사영의 은신처를 말해 황사영마저 체포되고 백서는 압수 당해 북경 주교께 밀송하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서울로 압송된 황사영은 황심, 옥천희, 김한빈 등의 신앙동지들과 같이 국청에서 어떤 교우보다 혹독한 심문과 형벌을 받았다. 12월 1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황심, 김한빈, 옥천희와 현계흠 등이 참수 치명하여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 때 황사영은 동지들과는 달리 백서의 작성자로 새남터에서 능지처참 육시의 형을 받았다. 황사영의 가산은 몰수되고 늙으신 어머니 이윤혜는 관노로 거제도에, 부인 정란주 역시 노비로 제주도로 각각 부처 되었다. 어린 아들 경한은 나이가 어려 추자도에 귀양 보내지니 실로 황사영은 신앙 그 하나로 이 세상에서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다 바친 순교자가 되었다.

 

황사영의 백서는 결안문과 함께 문서고에 버려져 어쩌면 역사 속에서 망실될 뻔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오묘하여 1894년 갑오경장이 단행되어 묵은 문서를 파기하던 중에 개화관료이며 천주교 신자였던 이건영(요셉)이 이를 입수하여 당시 조선교구장 뮈델 주교에게 전했다. 이렇게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백서는 1925년 로마에서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 때에 교황청에 헌정되었다. 바로 그 백서가 작성된 지 이백년이 되는 해에 한국을 떠난지 76년 만에 고국에 잠시 보내져 지난 순교성월까지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되었다.

 

황사영 백서는 그 서두에 『죄인 토마스 등은 눈물을 흘려 울면서 본주교 대야 각하께 호소합니다』하고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말미에는 『죄인 토마스 등이 두 번 절하고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라고 끝맺고 있다. 그러니까 황사영 백서의 서명 명의자는 황사영이 아니라 토마스 즉 황심(1756~1801년)인 것이다. 황사영은 왜 그의 백서를 작성하면서 황심의 명의로 올리는 것처럼 했을까! 아마도 황심은 그간 몇 차례 주문모 신부의 밀사로 북경교회를 내왕하였고, 북경에서 영세한 사람이며 북경교회 성직자들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기에 백서의 신빙성을 더하고 북경교회 성직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서사건으로 뜻을 함께 하며 협조한 순교자들이 적지 않지만 이제 잠깐 백서의 서명 명의자인 황심을 보자. 그는 내포지방의 덕산고을 용머리 사람으로 양반집안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입교 과정이나 신앙생활에 관해서는 주목할 만한 기록은 없으나 한국초대교회사에서 북경을 왕래한 밀사였으며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순교한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열심한 신자였던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열심한 신자로서 1799년에 순교한 이보현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그는 위험을 감내하며 북경교회에 파견된 밀사의 역할을 믿음직스럽게 해냈다. 1795년에 그는 교회의 대표로 뽑혀 압록강 국경의 책문에서 주문모 신부를 맞아 무사히 서울까지 안내하고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왔다. 그리고 1796년 9월에 주신부는 북경주교께 조선교회의 현황을 보고하고자 하였다. 이 때 그는 밀사로 뽑혀 부연사행 일행의 하인자리 하나를 사가지고 일행 속에 숨어들어 주신부의 라틴어 편지와 교우들이 쓴 한문편지를 옷 속에 감추고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주신부는 황심의 치밀하고 믿음직스러운 일 솜씨를 보고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3년 동안 계속하여 북경을 왕래하며 세례와 견진성사 때 사용할 성유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는 마침내 백서를 전달하기 위하여 평안도에 살며 말몰이꾼으로 부연사행을 따라 북경을 내왕하던 옥천희를 만나 비밀리에 사신을 따라 연말에 떠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1801년 부연사를 따라 북경에 갔던 옥천희가 귀국하다가 조선의 박해 소식을 듣고 다시 만주로 가서 중국교회에 이 사실을 급히 보고하고 귀국하다가 불행히도 국경에서 체포당하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황심도 체포당하게 되었다.

 

황심은 황사영과 그의 동지들과 함께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 천주교인이요 황사영의 백서를 전달하려 한 대역죄인의 판결을 받았다. 결안 받은 대로 1801년 11월 21일 참수되어 육시를 당했을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의 죽음은 비참해 보였으나 그는 위대한 순교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그동안 인기리에 연재됐던 「신유박해 순교자들」이 이번 호로 끝을 맺습니다. 관심을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과 필자 김길수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가톨릭신문, 2001년 12월 16일,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황사영 백서"의 서명 명의자 황심 토마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문헌들 가운데서 "황사영 백서"만큼 주목을 받고 비판과 논의를 불러일으킨 문헌은 드물 것이다. 백서(帛書)란 '비단에 쓰여진 글'이란 뜻인데,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 현황과 이에 대해 황사영이 생각한 대책을 북경 주교에게 건의하는 내용의 비밀 편지이다. 이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 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여졌는데 모두 122줄, 13311자로 된 긴 글이다.

 

"황사영 백서"가 작성된 곳은 충청도 배론에 있던 김귀동의 집이었고, 백서에 쓰여진 박해와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주로 김한빈 등을 통해 수집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정리한 때는 황사영이 배론으로 피신했던 1801년 음력 2월 전후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백서의 발신자로 서명한 사람은 황사영이 아니라 황심 토마스로 되어있다. 황사영은 이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고 하면서, 이미 조선교회의 편지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한 적이 있어 그 이름이 잘 알려진 황심의 명의를 빌려 호소함으로써 그 신뢰를 더하고자 했던 것이다.

 

황심 토마스(1756-1801년)는 충청도 내포지방의 덕산고을 용머리 사람으로 조선조 영조 32년에 태어났다. 양반가문의 자손인 그는 내포의 사도로 알려진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 무렵 덕산의 황모실 출신으로 이보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방탕하게 살았다. 황심은 그에게 모범적인 생활과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자가 되게 하였다. 이보현은 입교한 뒤 단정한 처신과 온화한 생활로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그는 박해 속에서도 두려움없이 가족들을 격려하며 해미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하였다. 황심은 이보현의 누이와 혼인하였다.

 

황심의 입교 과정이나 신심생활을 특별히 소개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위험을 무릅쓴 북경 왕래와 교회의 부흥을 돕는 기록에 자주 나타난다. 이런 기록들에서 우리는 그의 놀라운 활동상을 엿볼 수 있으며, 또 얼마나 열심한 신자였는지 알 수 있다.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시작된 한국교회는 박해를 받기 시작하면서 사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교회재건운동과 사제영입운동을 동시에 전개하여 한국교회 첫 사목사제로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게 되었다. 이때 사제영입운동의 주동자였던 최인길, 지황, 윤유일 등과 함께 황심도 참여하였다. 황심은 1794년 12월 교회의 대표로 뽑혀 국경으로 나가 책문에서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였으며, 그뒤 신부의 전교활동을 도왔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발각되어 최인길, 지황, 윤유일이 순교한 뒤로는 황심이 북경과 연락하는 밀사의 사명을 맡게 되었다.

 

최인길의 임기응변과 희생으로 피신에 성공한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은거하면서, 1796년 9월에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 천주교회의 현황을 보고하고자 하였다. 이때 황심은 밀사로 뽑혀 주 신부의 라틴어 편지와 교우들의 한문 편지가 쓰여진 명주 두 조각을 옷 속에 감추어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고 귀국하였다. 황심은 이 일을 계기로 약 3년 동안 여러 번 옥천희, 김유산 등의 동지와 함께 밀사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조선교회에서 성사집행에 필요한 성유 등 성물을 가져와 신부의 사목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정조가 제위 24년 만에 승하하고 순조가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를 계승하였다. 이에 정순왕후 김계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1801년 한국 최초의 전국적 박해인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심은 강원도 춘천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그는 황사영이 피신해 있는 제천 땅 배론으로 찾아가, 주문모 신부의 순교 사실과 조선교회의 비참한 사정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는 방안을 의논하였다.

 

이렇게 해서 황사영은 백서를 쓰고 그 명의를 북경 주교와 면식이 있고 잘 알려진 황심의 이름으로 하였다. 자신의 세례명인 토마스란 명의로 된 이 백서를 황심은 그의 동지 옥천희를 시켜 북경에 전달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뜻밖에 옥천희가 책문에서 체포당하고 그의 고발로 1801년 10월 22일 황심이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옥에 갇힌 황심은 자신이 사실을 자백하면 박해가 확대되지 않으리라는 희망에서, 일찍이 "일이 위급하게 되면 나를 밀고하라."던 황사영의 명에 따라 황사영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이 때문에 황사영, 김한빈 그리고 현계험 등의 동지들이 모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황심과 함께 이들 신앙의 동지들은 황사영의 백서 송사 사건으로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순간도 흐트러짐없이 신앙을 고백하고 조정의 지나친 의심에 바른 해명을 했으며, 모두 사형판결을 받고 의연히 순교의 길을 걸었다. 당시 황심 토마스에게 내려진 결안은 이러했다.

 

"황심은 비천하고 비열하여 사교에 빠졌고, 서울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불충하고 상스러운 파당을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이고 암약하였다. 그는 비밀히 외국에 가서 서양교의 이름을 받았으며, 주문모 신부를 위하여 여러 번 여행하고 그의 편지를 전하였다. 사교를 믿는 자들이 꾸민 일 중에 그가 미리 알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삶과 죽음을 걸고 황사영과 결탁하였고, 황사영이 법망을 벗어나기 위하여 제천으로 간 것을 알자 일부러 그를 만나러 갔다. 또한 밤에 베개를 같이 베고 누워서 그 흉악한 편지를 제 눈으로 읽었는데, 그 편지의 잔학함은 고금을 통하여 하늘 아래 비길 것이 하나도 없다. 붓으로 그 흉악함을 쓸 수 없으니 그러한 일은 일찍이 보도 듣도 못한 까닭이다.

 

황심은 뻔뻔스럽게도 황사영과 짜고 배들을 불러들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고 이 편지를 외국인들에게 보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의 흉측한 계획은 발각되었다. 그는 역적이요 대죄인이다. 그를 서소문 밖으로 끌어내어 육시를 하고 참수하라."

 

황사영 백서의 마지막 줄에 "천주강생 후 1801년, 시몬 다두 첨례 후 1일, 죄인 토마스 등 두 번 절하고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라고 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서명된 명의의 주인공 황심은 결안대로 참수되고 육시를 당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의 명의로 작성된 황사영의 백서 원본은 우여곡절 끝에 1894년 고문서 파기 때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주교는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께 선물하여 지금 교황청에 소장되어 있다. [경향잡지 2000년 4월호, 김길수 요한(전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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