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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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하느님, 자연 그리고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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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22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하느님, 자연 그리고 인간

 

 

신학교에는 울창한 숲이 있다. 서울 성곽과 고목들에 둘러싸여 사는 남다른 행복에 늘 감사하면서도 나에게는 거대한 나무가 가득한 원시림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특히 캘리포니아 북부에 위치한 레드우드 국립공원은 내가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다. 그곳에는 고대 자이언트 세쿼이아의 사촌 격인 레드우드가 100m 이상 치솟아 있다.

 

캘리포니아가 원산지인 적갈색의 미국 삼나무 레드우드는 가장 성장이 빠른 생명체로 꼽힌다. 묘목은 화창한 날씨에서 매년 1.8m씩 자라고, 3세기를 거치면 100m 이상의 거목으로 자라난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나무 생물학자 토드 도슨은 가장 높은 레드우드의 키를 137m까지 측정했는데, 안개가 많은 곳에서는 더 높이 자랄 수 있다고 한다. 수령이 2천 년 이상인 레드우드도 있단다. 레드우드의 밑동을 파내고 그 안을 자동차가 통과하게 한 모습을 찍은 사진은 이 나무가 얼마나 거대한지 보여 주는 예다.

 

지난여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가톨릭 성령 쇄신 25주년 대회 일정이 끝난 뒤, 나는 마침내 레드우드 공원을 찾아갔다.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십여 시간을 달린 긴 자동차 여행의 피로는 레드우드가 모습을 드러낸 유레카 지역에 이르자 눈 녹듯 사라졌다.

 

아치를 이룬 거대한 나무들의 환영을 받으며 나는 그들의 세계에 들어섰다. 태평양의 습기와 안개를 먹고 사는 레드우드의 숲에는 신비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시선을 압도하는 거대한 나무들과 두꺼운 껍질에 담긴 수천 년의 역사가 깊고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어 내 몸과 마음을 씻어내고 나를 태고의 성전으로 이끌어 주었다. 도무지 햇살을 받아들일 수 없는 무성한 나무들의 지붕 아래에서 나는 외부 세계와 격리되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거대한 나무들은 자연의 성전을 떠받치는 기둥인 듯했다. 레드우드는 땅과 하늘을 이어 주는 사다리처럼 하늘을 향해 드높이 솟아 있었다. 참으로 형언할 길 없는 외경畏敬과 감동으로 나는 레드우드 숲을 순례하였다.

 

우리는 왜 나무를, 숲을, 나아가 원시림을 동경할까? 아담과 하와가 살던 에덴 동산의 숲이 우리의 기억 속에 태고의 원형으로 자리하고 있어서일까? 인류의 먼 조상이 오랫동안 숲의 나무 위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그리하여 우리가 여전히 원시의 나무와 숲을 그리워하는 것은 창세기의 에덴 이야기와 인류 진화의 역사가 남긴 아득한 과거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숲은 어머니의 넉넉한 치마폭처럼 우리를 감싸고 돌보아 준다. 숲에서 우리는 존재의 안정과 편안함을 느낀다. 숲이 본시 우리 조상에게 삶의 터전이었기에 그러했으리라!

 

대지가 어머니라면 숲은 어머니의 치마폭이다. 정작 레드우드 숲은 하늘을 가린다. 어머니의 치마폭에 감싸인 아이가 세상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숲은 안정과 편안함을 주되 땅에 집착하게 한다.

 

그런데 하늘을 향한 나무들의 기립 자세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거대한 기둥 사다리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야곱의 사다리처럼 못내 태양을 그리워하고 하늘을 기리는 애절한 몸짓은 아닐까?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7)라는 야곱의 고백처럼, 레드우드의 드높은 정상에 오르면 우리도 하늘 세계에 들어설 수 있을까?

 

오늘날 현대인은 자연과의 연대성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자연의 신비에 둔감하다. 자연을 단지 놀이나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자연을 즐기는 것과 자연과 연대성을 느끼며 사는 것은 같지 않다. 전자는 자연을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고, 후자는 자연을 내 몸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태도이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고 대상화하는 과정은 철학적·과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인간이 진리의 준거를 자기 의식 안에서 찾으려는 데카르트의 성찰(‘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후, 서구의 근대 철학은 육체와 분리된 정신주의로 나아가고 자연과 분리된 인간중심주의로 발전하였다. 또 인간의 정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하는 물질주의로 귀결되었다. 아울러 인간 지성은 과학을 발전시키고 그것이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지면서 기술은 소비를 자극하고 확대시켰다. 인류의 무분별한 개발과 과소비가 자연을 파괴하고 ‘지구 온난화’라는 생태계의 위기를 가져왔다.

 

오늘날 인류에게 닥친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0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로 ‘창조주 하느님과의 평화, 모든 조물들과의 평화’를 발표한 바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9년에 발표한 회칙 <진리 안의 사랑> 51항에서 “교회는 모든 이가 창조의 선물로 받은 이 땅과 물과 공기를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 성경은 생태 문제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은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느님께서 친히 창조와 구원의 역사에 개입하여 피조물 전체를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느님과 자연과 인간이라는 세 가지 근본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와 구원 또는 창조와 새 창조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다. 하느님께서 역사를 통해 당신을 계시하시고 마침내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육화 구도에서 인간은 창조와 구원의 정점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 중심적 구원관을 근거로 자연을 경시하거나 착취해도 무방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성서적 인간 중심주의를 거슬러 모든 생명이 차별 없이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심층생태학(deep ecology)도 결코 옳지 않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이 구원되리라(로마 8,19-21 참조)고 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자연, 인간이라는 삼중 연기(緣起) 구조에서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일이다. 인간이 창조와 구원의 섭리 아래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며 하느님의 뜻대로 자연과 다른 인간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연재할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는 하느님, 자연, 인간의 삼중 관계에서 올바른 생태 질서와 정의가 무엇인지 새겨 보고자 한다. 종전의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 자연계의 모든 존재가 깊이 관련되어 영향을 주고받으며 의존하고 있다는 생태적 연대성의 전망을, 창세기를 필두로 성경 전체를 통해 그려 볼 것이다. ‘생태계’가 본시 먹이사슬의 연대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므로 성경에 나타난 섭생(攝生)의 문제도 중요하게 살펴볼 것이다. 먹는 문제야말로 생명이 스스로를 유지하고 다른 생명과 연대하는 생태 질서의 근간이다. 우리는 이 문제가 성경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 생태신학이 포함하는 생태 시대의 하느님, 성령, 로고스, 생명, 여성 등 다양한 주제를 헤아려 볼 것이다. 신약에 이르러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그 실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담긴 생태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마침내 ‘생태신학적 그리스도론’의 전망을 그려 볼 것이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대방동 성당 보좌를 역임한 뒤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97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월호(통권 442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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