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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하느님과 무(無)로부터의 창조(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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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23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하느님과 무(無)로부터의 창조(無)

 

 

창세기의 첫 구절은 아무런 전제 없이 하느님을 언급한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존재는 전제되어 있고 그분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의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창조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이루어졌는가? 2마카 7,28은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없는 데에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연역된 개념이 바로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다. 이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공히 가르치는 창조 교리이다.

 

창세 1장은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하면서도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한 땅과 심연이 있었음을 전제하는 모양새다. 그래서 어떤 원초 물질에서 하늘과 땅이 비롯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많은 철학자가 주장했듯이 일부 현대의 창세기 주석가들도 창조는 기존의 원초적 물질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이 원초적 물질조차 하느님께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 의존하기 때문이다. 2마카 7,28에서 도출된 ‘무(無)로부터의 창조’ 개념이 창세 1장을 올바로 이해하는 해석의 기준이 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동사 bara(창조하였다)의 두 번째 의미인 ‘분리하다’가 하느님의 창조를 이해하는 다른 단서를 제공한다. 유다교 신비주의자들인 카발리스트들은 동사 bara가 ‘밖으로’를 뜻하는 부사 bar와 연계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당신 밖으로 내보내셨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창조가 분리의 과정이라면, 창조는 무(無)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이고 하느님과 분리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무(無)란 무한과 구별할 수 없는 인간 지성의 한계를 가리키는 단어일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무(無)는 하느님 안에 있었고 사실 무無가 하느님이었다고 유다교 신비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들은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하느님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Deo)로 바꾸어 쓰기도 한다. 본시 세상은 하느님 안에 있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당신 밖으로 내보내셔서 세상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카발라(Kabbalah) 전통은 세상의 창조를 어머니가 배 속의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는 것에 비교한다. 시편 90,2은 “산들이 나기 전에, (하느님이) 땅과 세상을 낳기 전에”라고 하여 창조를 출산의 언어로 표현한다. 세상 창조에 이어 이스라엘 백성의 창조도 출산의 언어로 표현된다. 신명 32,18은 하느님을 의미하는 “바위가 이스라엘 백성을 낳았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사건을 출산과 양육의 언어로 표현하는 대목은 여럿이다(이사 42,14; 44,24; 45,10; 46,3; 49,15 참조).

 

어머니가 자식을 자기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자식이 자기와 다른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 다르듯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 다름 때문에 성경은 하느님과 세상을 계약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어머니가 자식의 고유성과 자율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듯 하느님께서도 피조물의 고유성과 자율성을 존중하고 배려하신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만물이 신에게서 유출되었다는 유출설과 다르다.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에서 말하는 바, 세상이 신의 죽은 몸에서 태어났다는 탄생설과도 매우 다르다. 세상을 하느님의 몸으로 이해하는 생태 신학자 맥페이그(S. McFague)의 범신론적 발상도 성경에 어울리지 않는다. 성경은 하느님과 피조물의 근본 차이를 강조한다(이사 45,21; 46,5; 예레 10,6-7; 49,19; 시편 35,10; 50,21; 86,8 참조).

 

창조가 하느님과 분리되는 과정이라면 구원은 하느님과 다시 만나는 과정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분리되어 계시되 세상을 돌보신다. 분리가 하느님의 초월(멂)을 체험하는 순간이라면 돌봄은 하느님의 내재(가까움)를 체험하는 시간이다. 하느님과의 멂과 가까움을 상징하는 공간이 바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이다.

 

지난 호에서는 작년 여름에 방문한 레드우드 숲의 체험을 나누었다. 숲의 체험은 땅의 체험이다. 땅은 하느님과의 가까움을 느끼는 영역이다. 땅에서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둘러싼 자연 환경을 만나면서 이 모든 것을 돌보시는 하느님을 가깝게 느낀다. 그다음 내가 보고 싶은 곳은 하늘이었다. 하늘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광야다. 나는 하늘을 우러를 수 있는 드넓은 대지로 발길을 돌렸다.

 

모하비 사막의 끄트머리, 밸리어모에 자리한 성 안드레아 분도 수도원 지역에는 여호수아 나무가 산재해 있다. 이 이름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팔을 뻗은 모습과 나뭇가지의 모양새가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 낮에는 43도에 이르는 태양의 열기에 갇혀 있다가 밤에는 별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탈출이 이곳 광야에서 날마다 이루어진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은하수와 책에서 본 별자리들이 고향처럼 우리를 반겨 준다. 사실 우리는 모두 별들의 후예가 아닌가! 어쩌면 그것은 탈출이 아니라 귀환이요 복귀인 셈이다. 숲이 없는 광야는 이처럼 우리를 땅에서 벗어나 하늘을 향하도록 이끌어 준다.

 

솔로몬은 일찍이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1열왕 8,27)라고 고백하였다. 하느님께서 여러 개의 하늘을 만드셨으나(창세 1,1 참조), 솔로몬의 지혜는 하늘 위의 하늘에도 계시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를 꿰뚫어 본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환시가들은 천상 세계를 여행하고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묵시문학의 형태로 전해 주면서도 하느님을 직접 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도 바오로도 세 번째 하늘까지 올라가서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2코린 12,4 참조). 하지만 그는 말씀을 들었지 하느님을 뵌 것은 아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초월성은 여러 개의 하늘로도 담아 내지 못한다. 그런데도 하늘은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초월성을 가리키는 탁월한 표지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밤의 천상 여행이 나에게 가져다 준 것은 우주에 대한 귀속감이었다. 우주 만물은 나에게 신비로 드러났다. 나를 포함하여 세상이 온통 신비이다. 세상이 하느님께 낳음을 받았다(시편 90,2 참조)는 사실로 말미암아 세상은 창조주 하느님의 더 큰 신비를 드러내는 성사가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성사인 이 자연을 우리가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생태윤리의 문제이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대방동 성당 보좌를 역임한 뒤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97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2월호(통권 443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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