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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창조와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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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27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창조와 진화

 

 

올해 4월 하순의 어느 날, 우리나라를 방문한 생태신학자 데니스 오하라 교수(캐나다 토론토 대학교)가 신학생들에게 생태신학과 생태영성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하라 교수는 생태신학의 논의가 비록 지구의 생태 위기에서 촉발된 것이 사실이지만, 생태 위기가 없더라도 생태신학은 그 자체로 존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다.

 

생태신학은 인간이 지구 생태계를 파괴한 결과 생명체가 멸종 위기에 직면하였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여 이에 대한 신학적 · 사목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탄생하였다. 하지만 이에 앞서 생태신학은 우주와 인간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보고 우주적 연대성의 관점에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새로운 신학적 성찰의 결실이다. 138억 년 전 아주 작고 밀도가 높은 양자 에너지에서 시작된 우주 이야기에서 가장 마지막에 출현한 생명체인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것과 연결되어 있고, 이 모든 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고 있다는 통찰에서 생태신학이 전개되는 것이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나는 오하라 교수, 이재돈 신부와 함께 4월의 생기로 가득한 신학교의 낙산 마루에서 떨어지는 꽃비를 맞으며 즐겁게 산책하였다. 나는 따스한 햇살과 훈풍과 흩날리는 꽃비와 우리 세 사람의 황홀한 만남이 있기까지는 138억 년에 걸친 기나긴 우주적 인고의 역사가 필요했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이 맥락에서 볼 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는 인간과 외부 세계를 갈라놓는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이고 매우 주관적인 관념론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우주의 모든 요소와 더불어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하고, 생명의 지구적 발현을 온몸으로 느끼며 생명의 충만함을 감격과 감사로 음미하고 있다는 사실 위에 굳건히 서 있다. 그러기에 이 생태 시대에 우리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우주가 존재하기에 내가 존재한다’로 바꾸어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 호에서 나는, 빅 히스토리(Big History)가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역사를 통합하여 인간과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할 때, 창세기가 당대의 빅 히스토리였다고 말한 바 있다. 빅 히스토리나 우주 이야기를 말하고자 할 때는 통합적 사고가 방법론으로 요구된다. 자연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신학의 경우에는 자연과학과 인문학과 계시 진리를 종합하면서 우주 안에서 인간을 보고 인간 안에서 우주를 이해하는, 상호 연계적이며 전일적인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창세기의 세상 창조 이야기는 사실 오늘날의 과학적 우주 이해와 맞지 않아 보인다. 먼저 엿새에 걸친 창조 이야기가 138억 년의 우주 역사와 맞지 않다. 사흗날에 창조된 땅과 식물이 나흗날에 나타난 별들보다 먼저 창조되었다는 것도 큰 모순이다. 그래서 창조 신앙과 진화론은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이질적 세계관이기에 서로 관련하여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창조와 진화를 전일적이고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창조는 혼돈(tohu bohu) 가운데 질서가 출현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엿새간의 창조는 매우 질서 있게, 그리고 단계를 높여가며 진행된다. 여기서 ‘가르다(badal)’는 동사와 ‘종류(min)’라는 명사가 자주 사용된다. 동사 ‘가르다’(창세 1,4.6.7.14.18 참조)는 혼돈 상태에서 창조되는 사물의 질서를 드러내고 ‘종류에 따라’(창세 1,11.12.21.24.25 참조)라는 표현은 수많은 생명의 다양한 질서를 가리킨다.

 

식물은 빛과 어둠의 가름, 물과 뭍의 가름 다음에 출현한다. 동물 역시 빛 물체에 의한 빛과 어둠의 가름 다음에 나타난다. 바로 여기에 두 가지 의미 있는 전망이 드러난다. 첫째 하느님의 가름, 곧 분리 행위야말로 자연의 조성과 생명의 자율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물을 갈라 땅이 드러나도록 하셨고, 땅에게 푸른 싹과 과일 나무를 돋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물의 분리로 생성된 땅이 그 위에 온갖 생명을 가능케하는 조건이 된다. 구분하고 분리하는 과정에서 생명의 개체성이 확보되고 생명의 자율성이 보장된다.

 

하느님께서는 물에서도 생물이 우글거리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마치 땅과 물에 내재한 자연적 힘에게 말씀을 건네시어 식물과 동물을 생성하도록 만드시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분리는 창조적으로 작용하여 물질에서 생명으로, 단순한 생명에서 복잡하고 다양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일련의 진화 과정을 가능케 한다. 성경은 자연계를 맹목적이며 기계적인 발전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이 법칙이 되고 하느님의 섭리가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진화와 돌연변이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두 번째로 지적할 점은 빛과 어둠이 분리된 뒤(창세 1,4.18 참조), 식물(창세 1,11 참조)과 동물(창세 1,20 참조)이 각각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는 생명이 바로 빛과 어둠이 갈마드는 과정을 통해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빛으로 말미암아 식물이 땅에서 돋아나고 빛물체들로 말미암아 동물이 물과 땅에서 번성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어둠은 무엇을 의미할까? 창세 1장을 쓴 사제들은 어둠의 현실이 생명의 또 다른 모습인 점을 간파하였다.

 

빛과 어둠은 생명과 죽음의 또 다른 모습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혼돈에서 피어난 생명이 겪어야 하는 환란과 고난,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바로 빛과 어둠이 분리되어 서로 갈마드는 자연의 순환 질서에 따른 것이다.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창조를 설명하려는 창조론자들은 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창세기의 저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적 언어로 창조를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창조를 주도하시되 땅과 물에게 생명을 낳도록 자율성과 목표를 부여하셨다고 기록한다. 이처럼 창조에는 종류대로 다양한 생명체가 출현하여 번성할 수 있도록 자율성과 함께 목표가 주어져 있다.

 

한편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를 주장하는 것도 성경의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파란만장한 우주 드라마에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아담 이야기에서 보듯, 피조물이 지닌 자유의 여백과 미래에 대한 불가 예측성은 지적 설계로 표현되는 당위성과 계획성에 들어맞지 않는다. 차라리 우연처럼 보이는 수많은 자연발생적 사건에서 회고적으로 하느님의 손길과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이야기에 더욱 잘 어울린다. 냉정해 보이고 우연적이며 맹목적으로 보이는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이 하느님의 섭리와 모순된다고 볼 이유가 없다. 사실 자연 선택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섭리는 마침내 역사의 종말에 가서나 밝혀질 것이다.

 

일찍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진화론이 가설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창조는 하느님의 놀라운 자유와 사랑이 빚어내는 신비이고, 진화는 하느님과 피조물이 함께 만들어 가는 창조의 과정이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대방동 성당 보좌를 역임한 뒤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97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6월호(통권 447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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