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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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학생도 청소년 사목의 대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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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44

고3 학생도 청소년 사목의 대상인가?

 

 

이야기 하나

 

한 사람이 친구를 방문했다. 그 친구는 산속 깊은 골짜기에서 살고 있는 농부였다. 친구 집 근처에 이른 그 사람은 어떤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1km 쯤 떨어진 곳에 작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그 들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들판에는 수천 마리의 새들과 동물들이 모여있었다. 너무 많아서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 작은 들판 가득히 발디딜 틈 없이 온갖 새들과 동물들이 모여있었다. 그러나 들판을 에워싸고 있는 아름다운 숲들은 텅 비어있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왜 새들과 동물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함께 모여있는 것일까? 왜 하늘이나 나뭇가지들 위로 올라가지 않는 것일까?' 새들과 동물들은 좁은 장소에 너무 많이 모여있었기 때문에 매우 긴장되고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았다. 전혀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친구 집에 도착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새들과 짐승들이 그곳에 모여있는 까닭을 물었다.

 

"그들에게 무슨 불행한 일이 닥친 걸까?"

 

친구가 대답했다.

 

"나도 전해 들어서 잘은 모르는데,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네. 이곳에 지주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무척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나봐. 그는 들판 가장자리에 높은 울타리를 세우고 곳곳에 경비원을 세워두면서 새나 짐승이나 이 울타리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은 모두 그 자리에서 죽이라고 명령했다네. 그리고 수천 마리 새와 짐승들을 그 들판 안으로 몰아넣었지. 그 들판은 그들에게 감옥이 된 거야. 그리고 수년 동안 그런 상황은 계속되었고 탈출하려는 새나 짐승은 모두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네. 결국 그들은 그들의 갇혀있는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자유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되었지. 그들에게 자유는 두려움과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되었어. 그러던 어느 날 그들에게 그렇게 포악하게 굴던 지주가 죽었네. 당연히 경비원들도 사라지고 울타리도 없어졌지. 이제 새와 짐승들이 그곳을 떠나는 것을 막을 것이 어디에도 없었네. 그런데 이상하게 울타리 안에 있던 새들과 짐승들 가운데 아무도 그곳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는 거야. 어느새 새들과 짐승들에게 정신적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나봐. 그들은 울타리가 여전히 그들을 가두고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곳을 영원히 탈출할 수 없게 되고 오늘도 그렇게 있는 것이라네."

 

친구에게 설명을 다 들은 그 사람이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누구도 그들에게 달라진 상황을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지?"

 

친구가 말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 몇 번이고 말했다네. 그런데도 그들은 듣지 않았지. 더 큰 문제는 새끼들까지 똑같은 생각을 갖고서 태어나는 거야. 그들 주위에 울타리가 있다고. 그런 생각은 그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버렸고, 새끼들까지도 그렇게 태어났다네. 아직까지도 많은 선한 사람들이 그들을 깨우치려고 시도하고 있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럴 때마다 새들은 무척 화를 내고, 짐승들은 그 선한 사람들을 공격하기까지 한다네. 그들은 혼란을 원치 않는 거야. 실제로 그들은 자유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 들판 밖의 세계는 부자유라는 철학을 만들어내기까지 한 것이지. 지금도 선한 사람들이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이미 자유로운 그들에게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고 울타리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기는 불가능한 듯하네."

 

 

고3 학생도 청소년사목의 대상인가?

 

1997년 서울대교구 사목교서를 보면 "청소년사목이란 청소년(중·고등학생 연령층) 한 사람 한 사람의 전인적 성장과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며 "청소년들을 참으로 사랑하고 깊이 이해하면서 그리스도를 알려주고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복음의 의미를 스스로 깨우쳐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청소년사목은 '작은 어른'으로서가 아니라 '청소년' 그 자체로 집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1995년 연말 서울대교구 통계에 따르면 "청소년, 청년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자가 전체 신자의 4할에 해당하며 이들이 10년 20년 후의 우리 교회의 주류를 이룰 사람들이기에 교회는 이 계층에 대한 사목에 좀더 중심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사회 전반에 걸쳐 청소년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기에 청소년사목은 교회 안으로만 국한되어서는 안되며 더 넓은 의미로 우리 사회의 모든 청소년들에게 깊은 관심과 사목적인 배려를 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각도 한걸음 더 나아가 "청소년은 교회의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청소년사목이 과연 고3 학생들에게도 해당되고 있는가? 일선 본당의 중·고등부 주일학교 운영을 살펴보자. 대부분 본당에서 중·고등부 주일학교 교재를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만 준비해 놓았고, 중·고등부 주일학교 졸업을 고3으로 올라가는 고2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키고 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고3 학생들은 중·고등부 주일학교 미사에 나오지 않고 청년 미사나 다른 미사에 나오며, 더욱 안타까운 경우는 많은 학생들이 성당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러면 고3 학생들은 주일학교를 졸업한 청년사목의 대상인가? 하지만 청년사목은 '청소년 시절을 벗어나 대학교 또는 전문학교를 다니거나 직장생활을 하는 20-30대 젊은이들'인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고3 학생들은 누구인가? 고3 학생들은 청소년도 청년도 아닌, 어느 사목에도 관계가 없는 '정체불명'의 신자들이란 말인가?

 

 

어려움은 희망을 부른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분명 청소년사목의 대상이다. 그런데도 교회가 그들에게 손길을 펼치지 못하는 이유는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대입이라는 일생일대의 커다란 관문이 그들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들은 고등학교 3학년뿐만 아니라 재수생들에게도 해당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대학 진학을 위한 엄청난 노력과 경쟁들. 진정 20년도 채 살지 않은 어린 자녀들에게 미지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는 대학뿐이라고 가르치는 부모, 학교 사회의 분위기. 그래서 대학을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마치 낙오자처럼 느끼게 하는 세상의 시선들. 그리고 우리 나라를 지배하는 서울대학교, 일류대학. 이미 끝난 일이지만 작년 대선 이전에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일곱 명 후보가 모두 서울대학교 출신인 나라. 

 

이러한 입시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만 하는 그들에게 교육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다음은 한 고등학생이 국민교육헌장에 빗대어 풍자삼아 썼다는 "우울한 고교교육헌장"의 내용이다. 

 

"우리는 명문대 입학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학교에 들어왔다. 선배의 빛난 입시 성적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이기주의적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친구의 타도에 이바지 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입시의 지표로 삼는다. 영악한 마음과 빈약한 몸으로 입시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무시하고 우리의 성적만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아 찍기의 힘과 눈치의 정신을 기른다. 시기심과 배타성을 앞세우며 능률적 찍기 기술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완전히 타파하며 메마르고 살벌한 경쟁정신을 복돋운다. 나의 눈치와 이기주의를 바탕으로 성적이 향상되며 남의 성공이 나의 파멸의 근본임을 깨달아 견제와 시샘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남의 실패를 도와주고 봉사하는 척하는 학생 정신을 드높인다. 이기주의에 투철한 이기 전략이 우리 삶의 길이며 명문대 입학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배에게 물려줄 영광된 명문대 입학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눈치빠른 학생으로서 남의 실패를 모아 줄기찬 배타주의로 명문대에 입학하자." 

 

또한 한때 유명한 광고였던 "세계일류 -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이 광고는 좀더 편리하고 안락한 생활을 위해 '일류'가 되어야 하고 '일등'이 되어야 한다고,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기에 남을 짓밟고서라도 일등이 되어야 한다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나'만을 위해 남들을 내리밟고 저 높은 일류의 자리에 올라가야만 한다고, 이것만이 살 길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러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 과연 희망이란 무엇이고, 교회는 진정 그들에게 어떤 배려를 할 수 있는가?

 

 

하늘 보고 바다 보고 나를 보고 

 

한 학생이 고3 여름에 흐트러진 자기 생활에 답답하고 힘이 들어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하였을 때 선생님께 들은 조언은 '가서 바다를 한번 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 학생은 '엄마, 저를 찾아 떠납니다. 놀라지 마세요. 당당하고 자신있는 모습으로 돌아올게요.' 라는 편지를 남기고 가장 친한 친구와 인천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어느 섬에 내려 그 섬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파란 하늘, 잔잔한 바다, 여유로운 갈매기들, 노를 젓는 아저씨의 넉넉한 웃음, 그리고 꼭 잡은 손을 통해 느껴졌던 친구의 따뜻한 우정. 이것으로 그 학생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성숙을 배울 수 있었고, 자신이 한 뼘쯤 큰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희망이란, 글자 그대로 '기대하고 바람',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일에 대한 소원'이다. 물론 희망은 눈앞에 있을 수도, 저 멀리에 있을 수도 있다. 

 

앞의 이야기처럼 고3 학생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것 너머에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정말 하늘 한번 올려다 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갖는 것이 고3이라는 어려운 시간을 헤쳐나가는 지혜일 것이다. 교회가 그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사목적 배려 역시 안으로만 밀어넣지 않고,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숲을 볼 수 있도록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다가서야 한다. "아플 때는 약보다 사람의 손길이 그립다."는 어느 환자의 시처럼 말이다.

 

 

사랑의 손길은 펼쳐져야만 한다 

 

그렇다면 고3 학생, 재수생 등의 입시생들과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 - 자칫하면 소외되기 쉬운 - 고3 취업반 학생들에게 교회는 어떤 배려를 할 수 있는가? 많은 본당의 사목자, 교리교사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몇 가지 예를 들어 그들에게 펼칠 손길을 제시해 볼까 한다. 

 

첫 번째, 고3 학생도 주일학교 학생임을, 청소년사목에서 제외되지 않음을 알려주어야 하겠다. 앞에서 기술한 대로 많은 본당이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면 주일학교를 졸업시켜 주변인으로 겉돌게 하여 '고3은 공부하는 기계의 대열'에 그들을 밀어넣지 말고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고3 교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비록 고3 교리 교재는 없으나 다행히도 서울대교구 교육국에서는 1993년 5월부터 취업과 입시를 앞두고 내일의 빛을 찾는 학생들의 길잡이가 되고자 하는 「주님 가까이」라는 소책자를 월보 형식으로 발행하고 있다. 이 소책자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다른 계획을 잡아서라도 그들을 신앙의 소외지역으로 내몰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고3이 공부해야지.' 또는 '애들이 어울리면 또 놀기 시작한다.'라는 생각들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교회의 기능이 무엇인가? 교회가 세상이 가는 방향대로만, 세상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그것만 좇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세상이 물질 만능주의와 황금 만능주의로 흘러 수단이 목적이 되어가는 그런 상황에서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를 외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교회라고 생각한다. 곧 교회는 '역기능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고3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그저 앞도 보지 않고 뛰어가는 상황에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교회는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네 인생이 죽음의 시점에 도달하는 것만을 위해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여정에 의미가 더욱 크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또한 이 고3 교리에 사목자가 함께할 수 있다면, 밥 한끼라도 그들과 같이 먹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곁에 있어준다면 그들에게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두 번째, 학생 미사에 고3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는 소속감과 자신들의 자리를 펼쳐주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본당들이 학생 미사 때 학년 표지판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학년 표지판에 고3을 포함시켜 학생 미사에 그들이 참여할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 앞에서 서술한 대로 고2 때 졸업을 시키지 않는다면 이 부분은 더욱 효과적이라 생각된다. 고3 학생들에게도 그들이 주변인이 아니라 중심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고3이 되면 많은 부분에서 면제되는 - 고3은 상전(上典) 대우를 받는 -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고 해서 고3이 신앙에서도 면제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고3이라고 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장에서 소외시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세 번째, 입시생들과 더불어 그 부모님들을 위한 배려를 생각해 본다. 몇몇 성지에서는 입시 전 100일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다. 조금은 기복적인 모습이 있지만, 부모들의 그 바람을 교회가 저버릴 수만은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적으로 특별히 의미가 없는 100일보다는 54일 기도를 본당 자모회나 다른 단체가 주관하여 기도모임을 하면 좋겠다. 더불어 이 기도모임이 기복적인 면에 치우치지 않도록 사목자는 관심을 가져야겠는데, 그 한 방법으로 54일 기도 시작 미사나 말씀 전례 등을 통하여 54일 기도가 '우리 자식 합격시켜 주시고 다른 집 자식 떨어뜨려 주십시오.'가 아니라는 점을, 이 기도는 교회 공동체가 입시생들과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자녀들에게 주님께서 그들에게 열어주시는 길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인지를, 그들이 내일의 빛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저 빌고 복을 받는 식의 신앙이 아님을 일깨워 주었으면 한다. 또한 이때에 그 동안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진정 자녀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부모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또한 진정한 교육열이었는지 자기 체면을 위해서, 아니면 대리 만족을 위해서였는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도록 이끌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54일 기도 동안 사목자도 자주 참여하여 입시생 부모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함께 이 문제에 동참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네 번째, 54일 기도와 더불어 사목자가 입시생들에게 전화를 걸어주면 좋겠다. 물론 전화 통화가 되는 시간을 맞추기도, 통화를 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54일 기도에 나오시는 분들에게 또는 공지 사항을 통해서 그들과 통화 가능한 시간을 접수 받아서 연락하면 효과적이다. 통화 시간대는 주로 밤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다. 전화를 걸어보면 많은 경우가 성당을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어디엔가 의지하고 싶고 답답한 심정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도 간절하다. 그들에게 전화를 통해 많은 것을 줄 수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없겠지만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와 사랑을 담은 관심을 그들에게 건넨다면 그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과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까지도 체험하는 좋은 시간들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 전화를 거는 일이 사목자에게는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과 대화하며 사목자는 더 많은 것을 이들에게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 54일 기도 동안 부모들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기도하여야 함을 가르쳐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문을 짧게 작성해서 함께 기도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기대하고 바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하느님께 절실히 의탁하여야 함을 알려주어야 한다. 기도문 가운데 한 가지를 예로 든다면 테제기도의 'O Lord hear my prayer'와 같은 짧고 반복되는 기도로써 그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하면 좋겠다.

 

오,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오,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제가 당신께 청할 때 응답해 주소서. 

오,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오,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주님, 저에게 오시어 귀기울여 주소서.

 

또한 부모들에게는 '입시생을 위한 기도'나 D. 맥아더의 '아버지의 기도' 같은 기도문 등으로 진정 자녀들을 위한 기도가 어떠해야 할지를 알려주었으면 한다. 

 

여섯 번째, 많은 본당들이 하고 있는 것인데 입시 전 주일 '학생 미사' 때 입시생들에게 안수로 축복을 해주는 것이다. '학생 미사'라고 규정지어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들이 중?고등학생 공동체이고 한 공동체는 함께 기도하여야 함을 다른 학년 학생들에게도 알려주는 것이 교육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입시 전날 미사를 드림으로써, 그들이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를 느끼는 시간을 마련해 주는 것도 좋겠다. 그 밖에 찹쌀떡이나 엿을 주는 것은 그저 연례행사로서가 아니라 의미를 살려 마음의 여유를 주는 시간으로 잘 고려하여 행할 수도 있겠다. 또한 상본에 위안과 평화와 힘을 줄 수 있는 성서 구절을 적어 나누어주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일곱 번째, 입시날에 입시생 부모들을 위한 피정을 본당에서 마련하였으면 좋겠다. 입시날 입시생의 부모들은 사실 다른 일도 제대로 하기 힘들며, 하루 종일 불안하고 초조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대중매체에서 잘 볼 수 있듯이, 교문 앞에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떨며 기도한다. 물론 본당에 와서 혼자 기도를 할 수도 있으나 많은 경우에 입시생 부모들은 방해를 받는다. 그래서 성지를 찾아가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절에 가서 탑돌이를 하거나 불교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러한 마음들을 교회가 잘 헤아려서 이날 입시생 부모들을 위한 피정을 한다면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에 위로와 평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피정에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들에게 공동체를 체험하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다. 

 

끝으로, 입시가 끝난 다음 고3 학생들을 위한 피정을 하면 좋겠다. 이 피정을 준비하며 교리교사들이나 다른 이들이 고3 학생들에게 편지나 카드를 보내어 그 동안 많이 힘들었던 그들에게 격려와 위로를 주며 그들을 피정에 초대한다. 피정의 시기도 매우 중요한데, 기말고사가 끝난 뒤 시험 성적이 발표되기 전에 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 분심과 걱정 때문에 피정에 임하는 그들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피정 시기는 보통 대림시기 시작과 비슷한 때가 되므로 전례력으로 새해를 맞이하며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피정에서는 주로 그 동안 공부밖에 모르고 달려온 자신들의 과거의 삶을 돌아보며 현재의 자신을 보고, 공동체와 가정을 바라보며 미래를 설계해 보는 좋은 시간을 갖게 해준다. 그 시간에 고3 학생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그들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희망을 거슬러 희망한다 

 

예로부터 우리는 '가보(家寶)'라는 문화가 있었다. 그 집안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을 후손들에 보물로 물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 가보는 어떤 물질적인 것일 수도,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각자는 우리 후손들에게 무엇을 희망으로 전수할 것인가? 물질적인 것들이 모든 것을 뒤덮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후손들에게 전해 줄 것인가? 

 

고3, 그들은 이 시대를 사는 특수한 사람들이다. 다른 모든 것에서 분리되어 오직 '경쟁'과 '통과'라는 것에만 매달려야 하는 특수한 사람들이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중 그 1년이 가장 어렵고 힘든 고통의 시기라 생각된다. 하지만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고통의 순간일 것이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고통이란 행복과 은총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번제물"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어려움의 시간들이 하느님을 뵙게 되고, 하느님께 한 발 더 다가서는 시간들이 될 것이다.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가 결코 죽지 않으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난과 죽음에서도 다시 일으켜지심에 있는 것이다. 고통과 어려움, 어둠과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과 빛으로 걸어 나가게 되는 그 희망 말이다. 

 

고3 학생들에게도 교회는 '희망을 거슬러 희망'하는 법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바로 눈앞에 있는 그것만일 수도 있으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더 큰 희망이 있음을 전해 주는 것 또한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될 때 그들 모두가 기쁨과 웃음을 늘 간직하며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에 그리스도의 현존과 그분께서 주시는 희망이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존재하지도 않는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사목, 1998년 3월호, 김연범(서울대교구 방배동천주교회 보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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