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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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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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30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

 

 

영화제로 유명한 프랑스의 도시 칸느 앞에는 섬이 두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성 오노라(Honorat)’ 섬이다. 그곳에 자리한 레헹스 수도원의 이름을 본떠 ‘레헹스(L´erins)’ 섬이라고도 불린다. 400년대 초부터 오노라 성인이 그 섬에 정착하여 수도 생활을 시작한 뒤로 무려 1600년에 걸쳐 수도승들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다.

 

학생 때 와 보고 20년 만에 다시 찾은 레헹스 섬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수도승 22명은 새벽 4시 반부터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로 새벽을 일으켜 깨우고 섬의 하루를 시작한다. 해가 떠오르기 전 검푸른 하늘을 여행하던 초승달이 울창한 종려나무 사이로 마지막 얼굴을 내비친다. 그때 우뚝 솟은 성당의 종탑이 신비로운 빛을 발하면 차마 눈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꼼짝없이 붙들리고 만다. 차라리 그 자리에 붙박이로 서서 떨어지는 초승달을 보내고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것이 주님께 봉헌하는 또 다른 기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그곳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성당에 가만히 앉아 주님을 찬미하기가 힘들(?) 정도다. 낮에는 그냥 해안 길을 따라 거닐면서 기도하고, 밤에는 별을 헤며 찬미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다가 시간경을 바치러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평생 주님을 찬미하며 살아온 수도승들의 화음과 기도가 소박하고 견고한 고딕식 성당의 돌들과 어우러져 천상의 찬미가로 들려온다.

 

레헹스 섬의 또 다른 특징은 40헥타르에 달하는 전체 면적에서 8헥타르의 포도원을 수도승들이 경작하여 양질의 포도주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수도승들은 육체노동으로 자급자족하는 시토 수도회의 정신에 따라 ‘기도하고 일하라(Ora er labora)’는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간다.

 

이처럼 레헹스 섬은 드넓은 포도원, 소나무와 다양한 수종으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 지중해의 쪽빛 해안(Cote d´Azur) ^ 이 조화를 이루는 청정 지역이다. 아울러 인간의 노동과 기도, 온갖 새와 벌레(당연히 모기를 포함하여), 나무, 돌, 흙, 바람, 물 등이 어우러져 창조주를 찬미하는 생태 공동체이다.

 

하느님, 자연, 인간이 함께 어우러지는 이 섬의 하루는 일상을 넘어 영원의 시간으로 영혼에 새겨진다. 프랑스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 헌신한 엠마누엘라 수녀님(1908-2008년)도 이곳이야말로 영적 원천을 제공하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장소 중 하나라고 칭송하였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에서 창조의 신비를 묵상하지만, 사실 창조의 절정은 인간이 아닌가! 인간이 우주에서 가장 경이로운 피조물이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탄성부터 터져 나온다. 부모와 자식의 만남과 연인의 만남이 그렇다.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 원작의 영화 [파니(Fanny)]에서 파니는 아이의 아빠가 멀리 떠나고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를 보고 ‘이 세상의 경이(le merveille du monde)’라고 감탄한다. 성경의 아담도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하와를 봤을 때 크게 감동하여 부르짖는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엿샛날, 곧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이 창조의 절정이자 목표인 것이다. 생태계의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심층 생태학(Deep Ecology)은 성경의 이런 인간관을 인간 중심주의 사고의 산물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사제계 문헌은 분명히 말한다. 인간은 창조의 마지막 날에 매우 특별하게 창조되었다고! 그 특별함은 인간이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 비슷함(demut)과 모상성(selem, 라틴어 imago)을 하느님과 겉모습이 유사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흔히 지적하듯이 하느님께서는 형상으로 우상을 만들지 말라(신명 4,16 참조)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모습을 사람의 형상(1,26; 참조 다니 7,13)으로 묘사한 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상상력이 지닌 가능성이자 한계였을 것이다. 하느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다는 주장(신인동형론, anthropomorphism)과 반대로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을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이라는 주장(신형상론, theomorphism)은 동전의 양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느님 체험에 대한 인간 표상의 한계를 넘어서 하느님과 인간을 유사하게 만드는 근본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라는 복수형의 어법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누구를 상대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일까? 왕실에서 사용하는 위엄의 복수(pluralis majestatis)는 히브리어 문법에 나타나지 않는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내부 의논 과정이라는 그리스도교의 해석도 창세기 차원에는 적용될 수 없다.

 

유다교 라삐 전통에 따른 세 번째 해석은 이러하다. 하느님께서는 천상회의에서 네 천사와 의논하셨는데, 각각의 천사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대표한다. 평화와 진리는 인간이 만들어 낼 파괴와 거짓을 염려하여 인간 창조를 반대했지만, 정의와 사랑이 이를 찬성하면서 결국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통해 실현하시려는 가치이다.

 

마지막 네 번째 해석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창조될 인간과 함께 의논하신다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하느님의 파트너인 셈인데, 피조계 전체를 상대로 진리, 사랑, 평화, 정의를 구현하는 파트너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왜 인간을 당신과 비슷한 모습으로 만드시고, 그것도 의논하는 상대로 인간을 선택하여 만드셨는가에 대한 최종 답변이 될 것이다.

 

프랑스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는 <미래를 위한 생태학적 도전과 과제>(2012년)라는 문헌에서 인간의 역할을 하느님의 창조 계획에 참여하는 ‘공동 창조자’로 표현하였다. 한편 창세 2,15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일구고 돌보게 하시어 피조계의 관리자 또는 청지기로 삼으셨다고 묘사한다. 공동 창조자라는 표현이 인간에게 과도할 수 있지만, 창세 4,1은 하와가 하느님과 함께 남자아이를 얻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생명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동반자요,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공동 창조자다. 나아가 인간은 이성의 능력과 삶의 의지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도록 우주 안에서 매우 특별한 소명을 지니고 있다. 다음 호부터는 공동 창조자로서 인간이 받은 소명에 대해 살펴보자.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대방동 성당 보좌를 역임한 뒤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97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9월호(통권 450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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