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채식에 의한 원초적 생태 질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31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채식에 의한 원초적 생태 질서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몽고의 대초원에서 말들이 풀을 뜯고 미국의 거대 목장에서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는 장면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풀은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고 동물은 싱싱한 풀을 실컷 먹고 배설한다. 그 퇴비로 비옥해진 땅에 또 새로운 풀이 돋아나 생태계는 아름다운 순환을 반복한다.

 

사실 먹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시고 생명이 번성하도록 복을 내려 주셨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취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이어 가고, 자신도 다른 생명에 이바지한다. 먹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모든 생명이 동일할 것이다. 소는 온종일 풀을 뜯으며 행복해한다. 식사는 생명을 주고받는 자리이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 황홀해할 때가 있다. 유학 시절, 한국 음식을 정말 오랜만에 먹었을 때 밥과 김치와 불고기가 뿜어내는 냄새와 맛에 매료되곤 했다. 지금도 밥을 먹으면서 황금빛 들녘에서 넘실거린 벼의 싱싱한 생명이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는 음식을 눈으로 만나고 냄새와 맛으로 만난다. 음식을 섭취하는 과정이야말로 다른 생명과 소통하는 생태계의 가장 근원적 질서다. 우리도 소처럼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그 맛을 음미하고 생명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재배와 유통, 요리에 이르기까지 음식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에서 노고를 아끼지 않은 이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더 좋을 것이다.

 

식사 시간에 침묵을 지키는 수도승들의 전통은 공기, 물, 음식 등 다른 피조물과의 동화를 경험하도록 이끌어 준다. 하느님 안에서 음식을 먹는 식사 시간이야말로 하느님, 인간, 자연이 한데 어우러지는 가장 친밀한 일치의 시간이다.

 

먹는 것과 함께 동화(同化)의 또 다른 형태는 성적(性的) 결합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라”(창세 1,28 참조)고 말씀하신 다음, 먹을거리를 언급하신 것(창세 1,29 참조)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먹는 것과 성적 결합은 생명 현상의 두 근간이다. 성적 결합으로 생명이 탄생하고, 먹어서 생명이 유지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먹으라고 하셨는가?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창세 1,29-30).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들을 다스리는’(창세 1,28 참조) 권한을 주셨다. 그러나 이 다스림의 특권은 두 가지 제한을 받는다.

 

첫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라”고 복을 내려 주셨지만 다른 생명도 번성하도록 복을 주셨다. 피조물 전체에 대한 강복(창세 1,31 참조)은 인간 중심주의를 제한한다. 토마스 베리는 모든 창조물에게 세 가지 기본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존재할 권리, 자신의 목적을 이룰 권리,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취할 권리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권리가 모든 피조물에게 같은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권리를 갖는 반면 숲과 동물은 그만의 고유한 권리를 갖는다. 모든 권리는 상대적이며 제한적이다. 그러기에 모든 생명은 서로를 인정하여 함께 번성하도록 협력해야 한다.

 

둘째, 인간이 본래 채식을 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은 에덴 동산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외에는 모든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를 따 먹도록 아담에게 허락하셨다. 따라서 동물은 채식하는 인간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고, 인간도 채식하는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평화가 있고,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 그 부드러운 지배가 인간과 동물이 상호공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왜 하느님께서 인간과 동물에게 채식을 창조 질서로 부여하셨을까? 풀이나 열매를 먹는 것은 개체성을 소멸시키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풀과 열매는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개체적 생명이 스스로 증식한 결과이다. 뿌리와 줄기가 남아 있는 한 그 결실은 철 따라 반복하여 재생산된다. 식물은 모든 생태계의 근간이다. 식물이 없으면 지금의 생태계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식물이 있기에 곤충이 존재할 수 있고 또 척추동물과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 주기적으로 아낌없이 베푸는 식물이 있기에 생태계는 선순환을 이룰 수 있다. 개체는 사라지지 않으면서 열매와 풀로 동물과 인간을 양생시키는 식물 덕분에 생태계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고 창세기는 그리고 있다.

 

그러나 채식에 의한 생태 질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개체적 생명을 죽이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성경은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한다(창세 6,11 참조).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인간이 동물을 죽여 먹이로 취하고, 때로는 동물도 인간을 죽여 먹이로 삼으면서 폭력이 세상을 채운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폭력이 세상에 들어왔는가? 이 문제는 아담과 카인의 이야기에서 다룰 것이다.

 

채식에 의한 생태계의 평화 회복이라는 주제는 이사야서에 다시 나타난다.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이사 65,25; 참조 11,7). 그러나 이 현상은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질 미래의 꿈이다. 여기서 늑대와 새끼 양은 폭력적 인간(제국주의 세력 같은)과 비폭력적 인간(고난받는 주님의 종 같은)을 상징하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모든 생명의 개체적 존엄성을 강조하는 성경은 보편적 채식에서 죽임이 없는 생태계의 질서를 보았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이를 먹을거리로 내놓으신 까닭은 채식으로 생태 질서를 회복하시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채식주의를 창조 질서에 따른 올바른 생태적 삶으로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노아의 홍수 이후에 인간에게 육식을 허용하시기 때문이다(창세 9,3 참조). 중요한 것은 채식의 의미를 성찰하는 일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무엇을 먹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We are what we eat). 개체적 생명을 죽여 얻은 고기를 먹는 사람이 생명을 죽이지 않고 채식하는 사람보다 폭력성을 띨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와 힌두교의 수도승이 육식을 하지 않으려는 것도 인간의 동물적 폭력성(성적 충동 포함)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대방동 성당 보좌를 역임한 뒤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97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백운철 스테파노]



1,30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