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강론자료

2016-0124.....연중 제3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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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6-01-23 ㅣ No.1966

연중 제3주일 (다해)

느헤미야 8,2-4.5-6.8-10        1코린 12,12-30      루카 1,1-4; 4,14-21

2016. 1. 24. 이태원

주제 : 세상에서 내가 하는 행동의 효과는?

일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의 숙명(宿命)인지 운명(運命)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일을 합니다. 그렇게 움직이는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은 태어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잘 하는 일이 무엇인지 늦게 깨닫는 특징이 있습니다만, 태어나면서부터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그 첫 번째 목적일 것입니다. 움직여서 먹을 것을 찾고 돈이라고 표현된 수입을 얻게 되고,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을 또 다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움직입니다. 그렇게 움직이는 삶의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태어난 삶을 목숨의 유지나 자손의 번성이나 비석에 이름과 그가 한 일을 몇 글자로 남기는 것을 전제로 할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그런 목적에 더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 삶의 보람을 만들고 그 삶의 보람과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주신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세상이나 신앙에서 말하는 이러한 목표는 그저 목숨이 유지되기만 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매순간의 삶에 실천할 수 있는 올바른 태도를 세워야 하고, 그에 따라서 그렇게 세운 목표를 실현하려고 애써야 하는 일이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그렇게 따르는 일을 우리가 엉터리로 대한다면, 삶에 대한 계획을 완벽하게 세운다고 하더라도 내가 바라는 좋은 일은 내 삶의 결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그 누군가가 우리에게 알려주어야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의 삶에 좋은 일이 생길지, 나쁜 일이 생길지는 아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른다고 말하면서 누군가가 나에게 알려주어야 아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바로 그 대상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골자는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겠다고 선언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선언한 일을 실천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삶의 태도를 지니셨을 것인지 생각하고 묵상하는 날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 생각과 묵상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대하는 자세가 다르면 우리 삶에 다가오는 결과도 다를 것입니다.

생각이 세상의 일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묵상은 신앙이나 종교와 관련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태어난 존재로 잘 사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세례를 받은 신앙인으로 잘 사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기십니까? 여러분에게 갑작스레 드리는 질문에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대답은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고향 나자렛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서 앞자리에 나서시어 이사야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펴들었고, 희년(禧年)에 관한 내용을 찾아서 읽으셨으며, 그렇게 읽으신 내용이 당신이 세상에서 실현할 일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실현을 선포하신, 이사야예언서가 전하는 희년에 관한 말씀은 이사야예언서보다 먼저 쓰인 레위기(25,8-15)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선언은 예수님시대까지 진정한 희년이 실행된 적이 없었다는 안타까움을 전제로 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은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 몇 년 주기로 교황님께서 선포하십니다만, 그 효과를 누리는 것은 희년을 선포하는 교회의 직권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대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희년을 선포해야만 사람들이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누리는 행복은 내가 받거나 말거나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지만, 하느님의 축복은 늘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에, 내가 손을 뻗어 그 축복을 받아들이려고 하면 달라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독서로 들은 느헤미야역사서에 나오는 에즈라사제가 읽어주는 율법에 따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며 울었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그때에 처음 내려왔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는 소리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신앙인들에게 실현되는 것을 누가 막겠습니까? 교회공동체일까요? 본당에 있는 사제나 수도자일까요? 은총을 받아 누리는 것은 나 자신(!)’이라고 한다면, 그 일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정상입니다. 세상의 일은 다른 사람이 막을 수 있어도, 하느님의 은총이 사람에게 실현되는 일을 다른 사람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막으려고 도전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는 큰일이 날 것입니다. 나 스스로가 거부하고 멀리해서 실현되지 않는 일의 결과를 다른 사람의 탓이라고 하면, 나에게 무슨 이득이 오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다양한 은총을 받습니다. 현실에 있는 각각의 자리에서 그 은총을 어떻게 드러내고 어떻게 표현하려고 하느냐에 따라 내가 속한 공동체와 나와 함께 머무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가 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행동, 내가 하는 일의 효과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겠습니까? 내가 드러내는 삶의 자세는 어떠한지 그 삶의 모양을 돌아볼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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