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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프랑스 순례: 아비뇽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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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1095

[영원을 향하여 시간을 걷다 - 프랑스 순례] 아비뇽 가는 길


마르세유에서 아비뇽으로 가는 길은 정말 지루하지 않은 지형이었다. 명색이 프로방스, 어딜 가든 찬사가 쏟아지는 땅의 한복판을 달리는 길이었다.

심지어 때로는 그 밝고 눈부신 태양 아래 프랑스의 오필리아(셰익스피어의 「햄릿」 여주인공)가 떠올랐을 법한 물길마저 있어서, 빈약한 상상력조차 꿈틀대는 이야기들에 귀를 열게 되는 땅이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들 하지만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자손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는 법. 프랑스의 성왕으로 추앙받을 만큼 신심이 돈독했던 루도비코(루이 9세) 성인의 손자는 할아버지의 유훈에는 관심이 없었나 보다. 루도비코는 아들에게 남긴 영적 유언에서 “우리 자모이신 로마 교회와 우리의 영적 아버지이신 교황 성하께 공경심을 가지고 순종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사치가 심한 데다 왕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했다고 알려진 루도비코의 손자 필리프 4세는 성전기사단의 재물에 눈독을 들이다 결국은 그들을 이단으로 몰아 죽이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프랑스 내 교회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려다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반발하자 아나니에서 교황을 납치하여 감금하고, 마침내 아비뇽 유수를 초래하였다.



▶ 론 강에 생 베네제 다리(‘아비뇽 다리 위에서 Sur le pont d’Avignon’라는 프랑스 민요의 주인공 생 베네제 다리는 22개의 아치를 가진 900미터 길이의 다리였지만, 지금은 네 개의 아치만 남아있다 : 116-117쪽 사진)가 놓이자, 아비뇽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로 가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4세기 초에 교황이 거주하면서 아비뇽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던 교회의 수장이 옮겨왔으니 세상의 중심이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에 의해 교황이 되고, 그의 강요로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긴 클레멘스 5세가 가장 먼저 시작한 건 성벽의 보수였다. 그 후로도 교황들은 총길이 4.3킬로미터의 성벽을 축조했는데, 이 성벽은 유럽에서도 보존 상태가 좋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알퐁스 도데의 「교황의 노새」는 아비뇽에 교황님이 계실 때 얼마나 도시가 활기차고 생기에 넘쳤는지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건 소설 속의 이야기일 뿐 실제로는 교회도 교황들도 말짱한 상태일 수가 없었다.

교황청을 돌아보니 아비뇽에서 교황직을 수행했던 이들이 얼마나 거대한 감옥에 스스로 유폐되어 있었을지 안쓰러웠다. 두께가 3,4미터인 벽에 갇혀, 벽에 그린 벽화로나마 새소리를 들었던 파파! 더욱이 제자리를 벗어난 일이 제대로 좋은 열매를 맺기는 어려운 법 아닌가.

아비뇽 교황들이 때로 좋은 업적을 쌓기도 했다지만 교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로마로의 귀환을 간곡히 호소했다.

약 70년 동안 7명의 교황이 교황직을 수행한 뒤에야 아비뇽 시대는 끝났지만, 그 후유증으로 대립교황이 대두되어 서구 대이교의 원인이 되고 교권이 실추되는 등 아비뇽 유수의 여파는 1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 교황궁은 거대한 돌들로 이루어진 견고한 성채였다. 시모네 마르티니 등이 장식을 했다고 하지만 교황이 떠난 뒤로 방치된 데다 감옥으로 또는 군대의 병영으로 사용되고, 프랑스 혁명 때는 급기야 성상까지 약탈되어 현재는 과거의 흔적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공사 중인 교황청에 들어서서 베네딕토 12세(1334-1342년 재임)가 세운 구궁전과 클레멘스 6세(1342-1352년 재임)가 증축한 신궁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지만 어디가 언제 지어진 것인지, 어떤 기능의 방인지를 기억하기는 어려웠다. 건물들이 모두 텅 비어 특징이 없는 데다가 한 덩어리처럼 각각 붙어있어서 구분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몇 군데 장소만이 ‘교황청’이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환기시켰다. 예를 들어 17-19세기 태피스트리(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가 걸려있는 ‘그랑 티넬’은 추기경들이 교황을 선출하던 ‘콘클라베’ 장소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의 역할을 한 장소다. 14세기 사냥 풍경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는 ‘사슴홀’은 클레멘스 6세 교황이 생활하던 곳이다.

부르봉가의 루이 2세와 안 도베르뉴의 조각상이 누워있는 방의 벽에는 그레고리오 11세를 로마로 귀환하게 한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도 함께 있었다.



▶ 교회의 역사에서 ‘아비뇽 유수’는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치고받고 싸웠던 그 당시만 해도 이 땅에는 하느님이 계셨다. 하느님의 자리가 분명히 있었다. 이제는 상상만 가능한 그때, 아비뇽 교황청에서는 그 순간의 어떤 느낌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박제된 순간을 스쳐올 뿐이었으므로.

기념품 가게를 지나는 길에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튜닉을 입고, 역시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안장 위에 올라탄 성전기사단의 미니어처를 보았다. 비극적인 결말 때문에 도리어 전설이 되어버린 성전기사단은 오늘도 사람들의 판타지를 자극하고 있다.

떠나오는 길, 아비뇽의 성벽은 견고하고도 아름다워 보였다. 프로방스의 하늘, 프로방스의 들판은 파랑과 초록과 노랑의 끝없는 향연이었다. 바람마저 불어 이파리들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길이었다.

* 이선미 로사 - 서울대교구 혜화동본당 신자.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 성지를 순례하다 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3년 2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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