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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그리스도교 철학자: 위(僞)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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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159

[그리스도교 철학자] 위(僞)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


이른바 ‘위(僞)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라는 필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철학자를 소개합니다(2005년에 새로 펴낸 「성경」에서는 라틴어를 따라 ‘디오니시오 아레오파고스’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그리스어를 따르면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스’라 읽힌다. 영어로는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트’라고 읽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나라 책들에서는 보통 ‘위 디오니시우스’라고 칭하면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독일어를 따르는 「가톨릭 사전」의 표기대로 아레오파기타라 표기한다. - 필자 주).


그가 남긴 글들

그의 이름은 바오로 사도의 설교로 회심한 성인(사도 17,34 참조)의 이름을 딴 필명으로, 그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나 신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정확히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필명으로 6세기부터 글들이 전해졌고, 9세기경에는 라틴어로 번역이 되어, 아주 높은 명성을 얻었던 철학자였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13세기에는 대 알베르토 성인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 의해 그의 글들이 주해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남긴 글들로는 「하느님의 이름들에 관하여」(peri theion onomaton), 「천상적 위계에 관하여」(peri tes ouranias hierarchias), 「교회적 위계에 관하여」(peri tes ekklesiastikes hierarchias), 「신비신학에 관하여」(peri mystikes theologias)라는 작품들이 전해집니다. 특히 ‘신비신학’이라는 용어는 위 디오니시우스가 처음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의 신비신학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비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위 디오니시우스가 제기하는 철학적 성찰의 커다란 구조는 하느님께 이르는 세 가지 길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위 디오니시우스에게 하느님 자신은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인식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분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서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장소가 됩니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신비신학에 관하여」에서 우선 세 가지 단계를 구분합니다. 긍정신학, 부정신학, 그리고 상징신학이 그것들입니다.


철학적 성찰의 구조 - 긍정과 부정 신학

긍정신학은 주로 「하느님의 이름들에 관하여」에서 다루어지며, 성경의 말씀을 다룹니다. 우선 “하느님은 선입니다.”(마태 19,17 참조)라는 명제를 제시하면서, 이를 플라톤주의의 전통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이 선의 이데아를 최고의 이데아로 보는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아름다움과 선에서 나오며, 그것 안에 존재하며, 그것에게로 돌아갑니다. … 심지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도 선과 아름다움 안에 초자연적으로 존재합니다. 여기에는 모든 근원을 초월하는 것의 근원, 완성을 초월하는 결말이 있습니다. … 따라서 만물은 아름다움과 선을 바라고 열망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울러 존재, 생명, 진리와 같은 단어들로 하느님을 서술할 수 있으며, 이들은 동시에 부정신학으로 옮아가는 장소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기술할 수 있는 모든 것과는 다른 존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으신 분이고, 우리가 기술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존재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가 기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히 “하느님은 본질”이라고, 또는 “생명”이나 “이성”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육체성도 지니지 아니하시고, 장소도 형태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는 한 빛도 어둠도 아니며, 진리도 오류도 정신도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긍정을 넘어서기에 부정이 되고, 이 부정 역시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그 부정을 통한 또 하나의 인식이 되기에, ‘인식할 수 없음을 넘어서는 초월적 인식’이라는 역설적 서술이 가능해집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우리가 하느님은 인식할 수 없는 분임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미 훗날 ‘무지의 지(docta ignorantia)’를 역설하는 니콜라우스 쿠자누스(1401-1464년)의 사유를 미리 엿볼 수 있습니다.


신비신학 또는 상징신학

이제 위 디오니시우스는 긍정과 부정 신학을 넘어서, ‘신비신학’ 또는 ‘상징신학’이라 명명하는 것에로 나아갑니다. 신비신학은 우리의 경험적 내용들을 취하여, 그것을 하느님께 적용하여 번안해 냅니다.

예컨대, 성경에서 신에 대한 형상을 서술할 때 그러한데, 하느님을 “성채”라든지 “태양”이나 “샘”에 비유하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서 “분노하신다.”든지 “후회하신다.”는 표현 역시 그렇게 드러나는 기술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원래적인 단어의 의미라기보다는, 긍정도 부정도 실재적으로 표현이 어려운 하느님께 적용하기 위한 비유적 또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곧 긍정과 부정의 사이에 위치하는 표현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정신사 안에서 꾸준히 발전하면서, 긍정신학, 부정신학, 그리고 신비신학의 삼중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810-877년)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한테서도 이러한 삼중구조는 그대로 이어져 나타나지만, 하느님을 인식하는 다양한 방법으로라기보다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을 인식하기 위한 내적인 구성요소로 받아들여 “유비적인 신(神) 인식”에로 발전해 갑니다.

위 디오니시우스의 개념화할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통한 철학은 이제 이렇게 단순히 인식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진리”, “초월적 선”, “초월적 존재자”에로 사유가 이어집니다.

물론 그에게 이런 모든 사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놓여있는 “살아계신 삼위의 인격적 하느님”에게로 모아져, 가장 우선의 원리를 “하느님께서 다스리심”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여기서부터 세상의 모든 다양함이 비롯되었음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 허석훈 루카 - 서울대교구 신부. 1999년 사제품을 받고, 독일 뮌헨 예수회철학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교구 통합사목연구소 상임연구원을 지내고 지금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있다.

[경향잡지, 2013년 3월호, 허석훈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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