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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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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피로 사회와 안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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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33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피로 사회와 안식일

 

 

2013년 한 해도 저물어 간다. 저마다 올해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새해를 준비한다. 내가 일한 회사의 실적을 평가하고 개인의 성과를 계산하면서 이 한 해의 끄트머리를 마감한다. 모든 것을 양으로 판단하는 성과 사회의 모습이다.

 

작년에 출간된 《피로사회》라는 책이 많은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유도 우리 모두 성과 중심의 사회, 곧 피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21세기의 사회가 부정과 제한과 금지의 ‘규율 사회’에서 긍정과 자유와 탈규제의 ‘성과 사회’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규율 사회는 규율과 의무를 내세워 타인을 착취하지만, 성과 사회에서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주문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착취한다. 스스로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 성과 사회의 인간상이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성과 사회에서는 ‘너는 할 수 있다’는 정언만이 사회를 지배할 뿐, 사실 이 시스템의 지배자는 없다. 타인은 나의 소비 대상이 되고 경쟁 대상은 결국 자신으로 귀결된다. ‘너는 할 수 있다’는 명제를 수행하는 외로운 자기 착취는 끝내 나를 만족시켜 나를 이길 수 없으므로 결국 피로의 극단에 이르고 마침내 죽음으로까지 내몰리게 된다.

 

고립된 성과 사회에서는 최고경영자도 실업자도 다 같이 피로와 소진과 우울증에 빠져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자살하기도 한다. 자신을 착취하는 것은 실직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성과에서 오는 자기만족의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성과가 스스로를 억압하여 실적의 노예로 만든다.

 

사회적 약자와 분배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20 대 80, 1% 대 99%의 승자 독식 구조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 또한 성과 사회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 독식하는 승자도 만성 피로와 과잉 긍정의 주문에 사로잡혀 희생자가 되고 만다.

 

결국 피로 사회는 성과주의에 중독되어 타인을 대상화하고 자신마저 소외시켜 우울증, 자기 부정, 급기야 죽기까지 이끄는 자본주의의 간계이다.

 

우리가 피로한 것은 경쟁 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지만, 그 무한 경쟁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다 같이 피로하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피로 사회의 문제가 노자의 무위(無爲) 자연 사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자연이 무위이기만 할까? 피로 사회의 근본 원인은 인간으로 하여금 실적과 성공으로 내닫게 하는 자연스러운 충동과 경향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피로 사회도 사실은 자연이 낳은 산물이요, 자연의 한 모습이 아닌가! 유교의 유위(有爲)에 반대하여 무위자연을 주창한 노자의 가르침이 위대하긴 하지만, 피로 사회의 문제가 과연 무위 사상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유위도 무위도 다 자연의 모습인데….

 

창세기는 유위와 무위를 아우르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창조주 하느님은 일하는 하느님이시다(요한 5,17 참조). 자연은 일하시는 하느님의 산물이기에 자연에 속한 모든 존재는 하느님처럼 노동한다. 모든 생명에게는 자기 증식이 지상 과제다. 치열한 생존 경쟁도 번식하고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과정에 속한다.

 

하느님의 안식, 곧 휴업 또는 파업의 의미는 더할 수 없이 크다. 창조가 이루어진 7일은 ‘일’과 ‘쉼’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완성된다. 쉼이 없다면 완성도 없다.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쉬면서 자기의 본래 모습을 바라본다. 6일의 시간은 유위의 자아로 활동하는 시간이요, 제7일은 자신에게 돌아와 무위의 자아를 회복하는 시간이다. 안식일은 생산성을 지향하는 피로 사회의 유위의 엿새를 마치고,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쉬는 무위의 시간이다. 스스로 유위에 도취되어 자기를 착취하는 것이 피로 사회의 본질이라고 할 때, 하느님께서는 실적과 자아도취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신다.

 

<탈무드>는 하느님께서 만나와 인간의 얼굴을 통해 안식일을 강복하셨다고 말한다. 만나는 말씀이라는 영적 양식이며, 인간의 얼굴은 기능주의적 인간 모습에서 벗어난 자신의 고유한 인격적 모습을 의미한다. 그것은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표현되며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을 가리킨다.

 

생명은 선물이면서 과제이다. 유위의 6일은 과제로 사는 시간이되 무위의 이렛날은 선물로 사는 시간이다. 생명은 본질상 선물이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이사 58,13-14) 하시리라고 말한다.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날이 바로 안식일이다. 존재와 생명을 복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날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하는 현대인은 아무에게도 인정과 축하를 받지 못하고 자기 공허 속에서 우울증을 앓는다고 한다. 그러나 안식일에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6일의 노동도 칭찬받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받는다. 인간적인 모든 상대평가가 사라지고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참조).

 

안식일은 즈카 14,7에 의하면 ‘낮도 밤도 없는 날’이라고 불린다. 이날이 바로 메시아의 날이라고 말한다. 안식일은 이 영원한 안식과 광명의 세계에 대한 징표요 예시이다. 안식일은 영원의 상하에서 다른 6일을 지켜보는 날이다. 영원한 생명의 시각에서 생명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지켜보는 날이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이루실 창조의 완성을 그려 보며, 지금 내가 하는 일의 소중함과 그 한계도 함께 바라보는 날이다.

 

타자가 사라진 나르시시즘의 갯벌에서 자기 착취의 덧에 사로잡힌 피로 사회의 인간에게 영원한 타자는 하느님이시다. 나를 만들고 받아 주시는 하느님이 피로 사회에 대한 근원적 해답이다. 그 영원한 타자를 중심으로 그분이 만드신 생명들은 서로를 지켜보고 인정해 주는 따뜻한 타자가 될 수 있다. 타자는 나에게 소비의 대상도, 무한 경쟁의 대상도, 적도 아니다. 생존과 영속성을 향한 무한 경쟁도 영원의 상하에서 보면 다 살고자 하는 생명들의 안타까운 몸짓이 아닌가!

 

그래서 안식일에는 사람만 쉬지 않고 동물도 쉰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자기 착취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안에서 깊은 휴식을 취하고 존재의 기쁨을 향유한다.

 

저물어 가는 2013년을 하느님의 안식 안에서 훈훈하게 보내면 좋겠다. 다가오는 새해도 그분의 영원한 빛과 생명 안에서 맞이하고 싶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대방동 성당 보좌를 역임한 뒤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97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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