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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수치심 없는 사회: 거짓말과 수치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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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17 ㅣ No.958

[경향 돋보기 - 수치심 없는 사회] 거짓말과 수치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들어가는 말

십계명의 제8계명은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이다. 하지만 거짓이 난무하고 있는 오늘날 거짓은 일상의 한 부분이요 마치 사회생활의 필요악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울러 거짓을 뉘우치고 거부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수치심마저 실종 된 현실에서, 교회는 이러한 거짓말과 수치심을 어떻게 정의하고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자.


거짓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구약성경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진실성은, 십계명의 율법 때문에 진실성에 대하여 의무감을 느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하느님만이 진실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실하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인간만이 진실한 인간이었고(시편 24; 25; 50; 51편), 구약성경에서 “인간이 참으로 진실하다.”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진실성에 참여했기 때문임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거짓말의 죄악에 대하여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단죄하고 있으며, 거짓말을 하느님을 거역하는 행위이며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거짓말은 진리에 불충한 것이고 사탄의 행위이며(탈출 23,7; 욥 27,4; 시편 4,3; 5,7), 이웃을 속이지 않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다(레위 19,11; 로마 9,1; 야고 4,13). 그래서 예언서나 지혜문학도 거짓과 중상과 기만을 단죄하고 있다(예레 9,3-9; 나훔 3,1; 스바 3,13;잠언 4,24; 26,23-28; 집회 5,14; 28,13-26).

한편, 거짓말이라는 개념을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의로움과 진실한 종교와 반대되는 것으로도 나타나는데, 하느님을 몰라봄, 거짓 종교, 우상숭배를 나타내기도 한다(시편 78,36-39; 예레 13,25; 16,19-20; 호세 7,13; 10,13; 하바 2,18).

또한 이스라엘에서 재판의 증언 여하에 따라 피의자의 생명이 좌우될 경우에는 날마다 주민을 소집하였다. 따라서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이 계명은 동포인 이웃의 명예,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상의 구체적 표현이고, 그 목적은 자유인으로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데에 있었다. 그 이유는 증언에 따라 한 사람의 평판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좌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신약성경의 진리는 구약에서와 같은 의미로 하느님에 대한 성실(로마 3,3-7)과 자기가 한 약속에 대한 성실(로마 15,8)을 의미하며, 또한 하느님의 말씀(2코린 4,2)이 곧 진리이며, 복음이 진리(갈라 2,5-14; 에페 1,13; 콜로 1,5; 야고 1,18)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에 맞갖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1티모 2,4; 2티모 3,7; 티토 1,1-3).

특별히 요한에 따르면 진리는 사건이 되고, 가장 큰 사건은 진리가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곧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진실하심이 인류의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온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계시를 의미한다.

따라서 요한에 따르면 참된 제자는 진리의 사람이며(요한 17,17-18; 18,37; 1요한 3,19), 참된 제자는 진리를 따라야 하고(2요한 4,3; 3요한 3-4) 진실한 것을 행해야 한다(요한 3,21; 1요한 1,6).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이행하는 것이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요한은 말했다.

그러므로 거짓말이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계약을 깨뜨리고 불성실하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거짓 증언을 하는 자는 진실을 유린할 뿐 아니라 피의자에게 부당한 해를 끼치므로, 그의 소행은 사회 공동체가 그에게 요구하는 성실성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특히 다른 사람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거짓말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좋은 평판을 시기하고 깎아내리는 것도 이 계명에 저촉된다.

마르코 복음 10장 19절에서 예수님은 거짓 증언의 금지를 십계명 가운데 하나로 되풀이하여 가르치신다. 서간에 따르면 거짓말과 속임수는 낡은 인간의 것으로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콜로 3,9; 에페 4,25)라고 했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중상을”(1베드 2,1) 버려야 한다고 했다.

요한계 문헌에서 진리가 하느님의 계명에 대한 충실함이라고 한다면 그 반대가 거짓이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다”(1요한 2,4 참조; 1요한 1,6; 2,22; 4,20). 궁극적으로 거짓말은 하느님과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정신을 교부들도 그대로 이어받아, 거짓말은 신앙인의 생활과 부합될 수 없음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문제는 성경 안에서의 거짓말이다. 성조들의 이야기 가운데에는, 거짓말은 큰 잘못이 아닐 뿐 아니라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소개되고 있다(창세 12,12 이하; 탈출 1,12 이하).


거짓말의 정의와 교회의 가르침

거짓말은 한 인간의 내적 확신과 지식에 반대되는 구두 진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윤리신학은 보통 거짓말을 ‘locutio contra mentem’, 곧 마음에 두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말이라고 규정한다. 또한 거짓말은 아우구스티노의 정의대로 “남을 속이기 위한 거짓된 표현”(falsa significatio cum voluntate falendi; contra mendacium Cap.4)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 거짓말을 성립시키는 근본요소인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어떤 학자는 속이려는 의도가 거짓말을 성립시킨다고 말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속이는 것 자체가 거짓말의 성립요소라고 말하며(「신학대전」, Ⅱ-Ⅱ, q.110) 거짓말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단안을 내렸고, 많은 학자가 이 견해를 따랐다. 또한 거짓말은 언어의 본질에 반대되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 악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보나벤투라 등은 충분한 이유가 있으면 그릇된 말도 허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중세기 이후에는 “예외적 경우에 대하여 거짓말을 묵인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태도를 취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특히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이웃을 돕기 위한 비공식적인 거짓말과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적절한 거짓말은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과 일부 가톨릭 신학자들은 진리를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도 거짓말의 정의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에 거짓말(mendacium)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진리에 대한 알 권리를 침해하는 참되지 못한 말로 규정된다. 따라서 참되지는 않지만 진리를 알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며, 이것은 그릇된 말(falsiloquium)일 뿐, 진리를 거스르는 범죄가 아니라고 보았다.

특히 그로티우스는 거짓말과 그릇된 말을 구별하였는데, 거짓말은 진리에 대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비진리인 반면, 그릇된 말은 그렇지 않다고 보아 오로지 거짓말만이 윤리적으로 악인 것으로 보았다.

한편 가톨릭 신학에도 정신적 유보(restrictio mentalis)라는 이론이 나온다. 이는 모든 거짓말의 절대적 비합법성을 견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남용의 가능성으로부터 진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상황들을 위해 빠져나갈 길을 모색한 것으로, 진실을 감추려는 사람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 단어나 모호한 말을 선택하여, 단지 거짓말이 되지 않게 하려고 늘 이차적인 의미를 가진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이유는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할 경우, 비밀의 보호, 무죄한 생명의 보호, 강간에 대항한 순결의 보호 등의 경우와 진실을 알 질문자의 권리가 절대적이 아니라는 고찰에 토대를 두고 불법적인 침해로부터 그리고 진실의 악용이나 남용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권리는 모든 인간의 중요한 특권이므로 다른 사람의 권리를 경솔하게 거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때 침묵이나 회피, 또는 얼버무리는 것이 오히려 정당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선한 목적을 위해 거짓 또는 그릇된 말, 곧 말의 본질에 위배되는 방법의 사용이므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이 설은 1679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에 의하여 단죄되었다(DS 2126항).

현대에는 거짓말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의 학설에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거짓말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견해와, 거짓말을 ‘그릇된 말’과 ‘거짓말’로 구별하고 전자의 경우에는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종합적으로 보면 윤리적으로 거짓말이 성립되는 조건은 다음 세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생각하는 것과 표현이 서로 다르고, 둘째, 남을 속이려는 의도가 있으며, 셋째, 진실이 요구되는 상황이어야 한다.

이상을 종합하여 윤리신학적으로 정리하면 이러하다.

1) 거짓말이란 말의 근본목적에 어긋나는 일이다. 언어는 자기표현이며 진실한 의사전달을 하는 것이 목적인데, 잘못된 의사를 전달하는 데 언어를 사용하여 거짓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2)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서로 간의 신용과 신뢰를 파괴하고 악용하는 행동이므로 잘못이다. 선한 목적이 악한 방법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원칙에서 선한 목적을 위하여도 그 자체가 나쁜 거짓말은 인정할 수 없다.

거짓말을 허락할 수 있는 경우는, 말하는 사람의 정당방위의 경우와 물을 권리가 없는 사람이 질문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 한해서는 진실을 대답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거짓말로 정당방위가 성립되는 경우는 없고, 또한 자신의 진실에 대한 의무가 면제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진리를 대답할 의무가 없다고 하여 거짓말할 권리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3) 농담으로 하는 거짓말은 윤리적 의미로 본의적 거짓말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농담인 경우에는 진실이 요구되는 상황이 아니며, 또 서로가 한계점과 거짓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4) 자기가 진실을 말할 때 타인이 크게 피해를 받게 되는 경우는 물론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경우에도 거짓말은 정당화될 수 없고, 오히려 침묵으로 응답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수치심

사람에게는 타고난 수치심이 있다. 사람들은 이 수치심을 바탕으로 인간의 예의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얻고 건전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도움을 받는다. 수치심은 심리적 현상으로 볼 때는 사회성에 근거를 둔 것으로, 자기의 부족함이나 잘못된 것이 드러나거나 드러날 우려가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특히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보통 확신이 부족하거나 용기가 부족해서 생길 수 있고, 이기심이나 허영심,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나 불만에서 생기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거짓에 대한 수치심은 이러한 인간 내면에서 잘못된 생각들을 바로잡아 주거나 거짓이나 허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함과 동시에 이미 행한 거짓이나 허위에 대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거나 정화하게 한다.

따라서 진정한 수치심은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 앞에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진정한 겸손이 있을 때 생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신앙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나오는 말

거짓이 난무하고 거짓에 대한 수치심조차 상실된 오늘날 우리 현실에서 진실은 현대인이 가장 중요시해야 하며 서로가 신뢰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근본적인 덕성이다. 진실한 마음가짐이란 단지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 이상의 깊은 삶의 자세를 뜻한다. 곧 진실은 공동생활과 인간 상호 간의 만남을 통하여 꼭 지켜야 하는 근본원칙인 것이다.

오늘날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이나 다른 이의 진실하지 않은 삶에 무관심하고 예사롭게 여기고 수치심을 모르는 사회풍조이다. 진리와 생명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불가분의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일치될 때 거짓은 사라지고 진실한 삶이 영위될 수 있을 것이다.

* 김정우 요한 - 대구대교구 신부. 1992년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윤리신학 교수이며 대구관구 대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7월호, 김정우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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