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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에덴 동산과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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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35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에덴 동산과 제주도

 

 

2014년 청마(靑馬)의 해를 준비하기 위한 신학교 상주 신부들의 연수회가 지난해 12월 26일부터 29일까지 제주도에서 있었다. 공항에 늘어선 종려나무들은 늠름한 자태로 열병식을 하여 제주도를 찾은 육지 사람들을 반겨 주었다. 갈매기 떼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창밖으로 보이고, 정원에 종려나무가 늘어선 함덕 바닷가에 숙소를 마련한 우리에게 제주도는 영락없는 남국(南國)이었다. 눈 덮인 한라산의 위용과 300개가 넘는 오름, 거센 바람과 까맣게 그을린 돌과 씩씩한 해녀들이 있는 제주도는 육지에 사는 우리의 답답함을 씻어 줄 가까운 이국(異國)인 셈이었다. 제주도에 올 적마다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는데, 이번에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틀간 치열한 토론과 회의를 한 뒤 셋째 날 오전에 섭지코지 바닷가를 산책했다. 진눈깨비가 섞여 몰아치는 거친 바람 속에서 붉은 화산재로 만들어진 고운 흙을 밟으며 해안을 따라 걷는데, 문득 수면 위로 피어오른 해무의 기묘한 장관에 넋을 잃고 말았다. 바다를 가득 채운 해무의 선명하고 다양한 문양이 신비한 해상 왕국을 연출하는데, 휴대전화 카메라로는 도무지 잡히지 않아 그 영원한 찰나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이렇게 우리는 해무와 비바람과 붉은 흙속에 새겨진 제주도의 아름다움에 전율하며 그 평화로움에 젖었다.

 

산책을 마치고 일본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민트 레스토랑에서 마신 화이트 와인의 풍미는 섭지코지와 현대 문명의 절묘한 조화였다. ‘그래, 여기까지.’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벌일 수 있는 호사는 ‘여기까지’라고 여겨졌다. 그 이상의 파괴와 건설은 제주도의 자연을 망가뜨리고 제주도를 탐욕의 섬으로 전락시킬 것 같았다. 그러나 평화로운 자연을 사랑하는 우리의 소박한 바람이 개발과 경제 논리의 거대한 파고에 어찌 맞설 수 있겠는가! 더욱이 개발 논리가 안보와 만날 때 그보다 막강한 이데올로기가 어디 있겠는가!

 

오후에 찾아간 강정마을은 새로운 사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강정마을은 1km에 걸쳐 펼쳐진 구럼비 바위와 함께 제주도의 가장 중요한 문화재 보호 구역이다. 이어도에 빨리 갈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강정마을을 해군기지로 선정하여 바위를 깨고 항공모함과 크루즈선이 정박할 수 있도록 거대한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밖에서 볼 수 없게 가림막으로 현장을 가린 채 공사가 한창이었고, 그 주변으로 현수막들만 외로운 주장을 토해 내고 있었다.

 

“4·3에서 인간이 학살을 당했다면 강정에서는 자연이 학살당한 것이다.” “강정아, 너는 비록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에 평화가 시작되리라!”(강우일 주교 강론에서) ‘바람이 분다’라는 시를 쓰기도 한 영화감독 조성봉은 “강정은 바람이다. 파괴에 맞선 생명의 바람이다. 전쟁에 맞선 평화의 바람이다. 권력과 자본에 맞선 역사의 바람이다. 우리 모두의 바람이기도 하다”라고 썼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새긴 현수막도 여러 개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 쓰느라 폐쇄적인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원합니다.”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이 이어도와 그 주변의 해상 교역로, 수산 자원을 수호하기 위한 국가 안보 차원의 전략적 결정이라는 정부의 주장에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맞서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곳에 해군기지가 들어서야만 동북아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것인지, 정치와 외교로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나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사랑하고 끔직한 4·3 사건을 겪은 제주 사람들을 생각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한다. 물론 해군기지는 예정대로 건설될 것이다. 민간 차원의 반대와 염원이 그 공정(工程)을 가로막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미사는 날마다 오전 11시에 바쳐진다. 문정현 신부님은 민주화 보상 기금으로 산 자그마한 땅에 평화 센터를 짓고 앞으로도 평화를 위해 가르치고 기도할 것이라고 한다.

 

‘제주의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기도문’은 “풍성한 바다로 저희를 축복해 주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아름다운 오름과 돌과 숲으로 제주를 빚어 주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주님, 이 제주가 세상에 참된 평화를 실현하는 낙원이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끝을 맺는다.

 

제주도를 평화의 낙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도문에는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향수가 들어 있다. 창세 2,8은 주 하느님께서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고 말한다. 에덴 동산은 어느 곳이라고 지정할 수 있는 특정 장소라기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지배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명과 평화가 만개한 곳이 에덴이요 인간의 죄로 그것을 잃어버린 상황이 실낙원이다. 에덴이 이상적인 까닭은 창세 1,29-30에 따라 하느님께서 온갖 나무를 자라게 하시고 탐스럽고 먹기 좋은 그 열매를 먹게 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 먹지 못하게 하셨는데, 이 금령이 생명을 지키는 생명선이 된다.

 

에덴 동산 이야기는, 모든 것의 시작에 온전한 생명과 평화가 있었지만 불순종으로 그 생명과 평화를 잃어버린 상실의 신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창조는 이 실낙원에서 다시 시작된다.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 ‘토후 보후(tohu-bohu)’의 상황(창세 1,2 참조)은 광야와 사막의 모습이기도 하다(예레 4,23; 이사 45,18 참조). 그러나 이사야서는 하느님께서 광야로 오시어(이사 40,3 참조) 광야가 과수원이 되고 숲으로 여겨질 것이라고 말한다(이사 32,15 참조).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짐승과 함께 지내시어 광야를 메시아의 평화가 이루어지는(이사 11,6 이하 참조) 복낙원으로 변화시키셨다(마르 1,13 참조). 하느님의 창조는 이처럼 실낙원을 복낙원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지속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4·3 사건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은 제주도가 실낙원이 되는 사건이다. 그러기에 ‘제주의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기도문’은 제주도를 다시 생명과 평화가 넘실대는 낙원으로 복원시켜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고 아울러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참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저희가 물질적인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주시고 자연을 무분별하게 훼손하지 않게 하여 주시며 인간들이 의지하는 군사력이 결코 이 땅의 평화를 지켜 주는 보증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며, 신학대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2월호(통권 455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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