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한윤승 필립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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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21 ㅣ No.1062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한윤승 필립보 신부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연길 교구, 1911년 6월 9일 생, 북간도 용정
세례명 : 필립보
사제 서품 : 1936년 6월 7일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20일, 해주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6월, 해주(추정)


한윤승 필립보(韓允勝, 1911-1950?) 신부는 1911년 6월 9일 만주국 간도성 용정시에서 육십리 떨어진 시루애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필립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부친 한흥순은 옹기를 구우며 생계를 꾸렸고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으며 그는 장남이었다. 작은 체구에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제성소를 꿈꾸며 신학교에 들어가고 싶다는 원의를 주위에 자주 밝혔다. 1921년 11월, 그는 서울 백동 수도원에 개교한 원산 대목구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원산 대목구의 첫 신학생 13명 중 하나였다. 소신학교를 졸업한 뒤 1930년 덕원 신학교에서 대신학교 과정을 시작하여 철학과 신학공부를 마쳤다. 그는 예능에도 소질이 있어서 방학 때가 되면 집에 바이올린을 가져가 연주를 하였는데, 그럴 때면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몰려와서 구경을 하곤 하였다.

1936년 2월 23일 부제품을 받았고, 1936년 6월 7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같은 교구 소속 김충무 클레멘스(金忠武, 1910-1986) 부제와 함께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의 주례로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는 덕원 신학교 최초의 사제 서품식이었으며 연길 교구장인 테오도로 브레허(Theodor Breher, 白化東, 1889-1950) 아빠스가 참석하였고 서품식 후에 소박한 축하식이 열렸다. 그는 성체성혈 대축일에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덕원 신학교 교장인 안셀모 로머(Romer Anselm, 盧炳朝, 1885~1951) 신부가 미사 강론을 하였다.

한윤승 신부는 1936년 사제 서품 직후, 목단강 본당 보좌로 임명되었고, 그 후에는 용정 본당 보좌로 코르비니안 슈레플(Corbinian Schrafl, 周聖道, 1901-1990) 신부를 도와 사목활동을 했다. 용정에서 그는 빼어난 사목자의 자질을 발휘했다. 사교성이 좋고 결단력까지 갖춘 그는 본당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도맡아 해결했다. 1939년 그는 용정 상시 본당의 3대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한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을 국외로 추방하여 평양 교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洪龍浩, 1906-?) 주교가 인근 교구에 사제 파견을 요청하였을 때, 그는 평양 교구로 파견되어 1943년 6월 영유 본당 1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가 이후 1945년 10월에는 진남포 본당 10대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1948년 9월, 그를 비롯하여 평양 교구로 파견되어 활동하던 김충무 클레멘스, 한도준 마태오(1915-1998) 신부 등은 서울 교구에 속한 황해도로 옮겨갔다. 그는 해주 본당 10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여기서 그는 월남하기 위해 해주를 찾아오는 신부와 신자들에게 안내인을 소개하는 등 많은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한윤승 신부는 공산 당국의 의심과 감시를 받고 있다가 결국 1949 년 5월에 일어난 해주 시내 반공 유인물 살포 사건에 연루되어 5월 20일에 많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해주시 정치보위부는 이 사건을 일으킨 배후조직이 남한의 정치세력이 조종하는 반공지하단체이며, 그 조직의 책임자로 한윤승 신부를 지목했다. 사실 그가 그 지하조직에 참여한 것이라든지 성당 사제관에서 반공 삐라를 제작한 것 등은 모두 사실이었다. 더욱이 그 반공 지하조직원 명단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어 확실한 물적 증거가 되었다. 이 사건에 말려들었던 해주시의 많은 우익 시민들이 체포 숙청되었고 그는 해주시 인민재판소에서 15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그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지만 신의주 방면으로 끌려갔다가 6.25전쟁 때 살해되었거나, 체포 후에 해주 인근 바닷가 모래톱에 생매장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자료출처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Schematismus(오딜리아 연합회),
함경도천주교회사(한국교회사연구소, 1995년),
황해도천주교회사(한국교회사연구소, 1984년),
주성도신부자서전(분도출판사 1993년),
북녘 땅의 순교자들 : 평양교구 편(평양교구순교자자료수집위원회, 1999년)

[분도, 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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