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강론자료

2016-0131.....연중 제4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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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6-01-30 ㅣ No.1972

연중 제4주일 (다해)

예레미야 1,4-5. 17-19        1코린 12,31-13,13      루카 4,21-30

2016. 1. 31. 이태원

주제 :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실행하기

얼마 전에 구약성경의 인물 카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책을 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소개한 책을 읽으면서, 저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이 있기를 바랐는데, 그런 내용은 찾을 수 없는 안타까운 책이었습니다. 그 책은 무신론(無神論)의 차원을 넘어 세상에 만연한 있는 모든 불의와 부조리의 책임이 하느님에게 탓이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돈을 주고 구입한 책으로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보통으로 나올 수 있는 대답은, 그래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얻기 때문에 이론은 없는 질문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희년에 관한 말씀을 읽으시고, 그렇게 읽은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분이라고 했다는 루카복음사가의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주일에 들은, 희년에 관한 예수님의 선언다음에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요 히브리백성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말한 것을 예수님이 이루시겠다고 하자, 나자렛에 살던 사람들은 구원자가 이제 우리 곁에 왔고, 로마제국을 반대하여 세상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으로 예수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희년(禧年,=聖年)은 너나 나나 아무나 선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통치자가 할 수 있는 일로 이해하는 일이라고 여겼던 탓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자렛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에 놀라운 일을 하실 분이라는 보증으로, 예수님을 향하여 기적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기적을 보여주면 믿어줄게 하는 태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특별한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뜻이었고, 하느님의 뜻보다 기적을 먼저 찾는 나자렛에 살던 사람들은 놀라운 일을 통해서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하셨다는 뜻도 됩니다.

세상을 바꿀 혁명가를 기다렸던 나자렛사람들은 희년이 다가온 증거를 기적으로 보여주지 않은 예수님을 향하여 실망했고, 그분을 죽이려고 시도합니다. 예수님은 왜 희년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도, 그것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을까요? 안타깝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알기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가지셨을 마음을 제가 상상한다면,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하다. 세상사람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보다 한번 놀랍게 하고 사라질, 세상의 기적들에만 더 큰 관심을 가질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세상에서 놀라운 일을 보는 것은 일도 아닌데... 아쉽고도 안타깝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익을 추구하는 찾는 일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갖기가 쉬운데, 세상의 일과 신앙의 일이 부딪히고 충돌하는 때가 되면,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을 따라 사는 것이 옳은 태도이겠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부족한 것을 느낄 때, 그것을 메울 삶의 요소를 찾는 것보다는 더 쉽게, 나도 망하고 너도 망하는 방법으로 갈 때까지 가보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리려던 태도가 그 모습일 텐데, 그들이 보인 그런 행동들은 그들의 삶에 얼마나 행복한 결실을 만들겠습니까?

행복은 나에게서 시작되어 나를 만족시키고 다른 사람을 채우기 위해서 이웃에게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에게 오는 것이고, 나를 채운 다음에 나를 통하여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순서가 바뀌어도 좋다고 말하거나, 그렇게 들려오는 소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비판의식이 없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세상의 삶에서 구약성경창세기의 첫 부분에 나오는 카인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를 뺀 다른 사람들이 카인이 되겠다고 한다면 말릴 방법이 없다고 해도, 내가 신앙인이라면서 카인이 되어 사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아주 위험한 행동이 될 것입니다.

코린토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 바오로사도는 하느님의 축복에 참여하는 자세는 카인처럼 자포자기한 마음과 생각으로 세상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자세로 살아야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사랑에 관한 말씀의 효능을 여러분은 얼마나 받아들이겠습니까?

봐야 할 것을 제대로 보고, 들어야 할 것을 제대로 구별해서 들어야 신앙인으로서 움직이는 나의 삶이 올바른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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