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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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카인과 아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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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38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카인과 아벨 이야기

 

 

프랑스 철학자 로제 다두엥은 ‘태초에 폭력이 있었다’라고 창세기를 소개한 바 있다. 늘 제기되는 질문은 ‘왜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굽어보셨는가’이다. 토마스 뢰머는 《모호하신 하느님》에서 하느님이 아벨의 제물을 더 좋아하시는 데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편애를 설명할 유일한 근거는 하느님의 자의성이며,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탈출 33,19)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뢰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불공평함을 체험하는데, 그것이 바로 ‘카인의 경험’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 해석이 과연 본문이 의도하는 바일까?

 

먼저 성경 본문은 카인이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하와는 카인을 낳고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창세 4,1)고 말한다. 직역하면 “내가 하느님과 함께(’et) 남자를 얻었다”이다. 성경은 남자 아기를 남자(’ish)로 표현한 적이 없으므로, 여기서 ‘남자’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비롯하였다는 창세 2,23을 염두에 두고 쓰였을 것이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를 얻은 하와가 남자의 어머니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드러내는 독백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카인은 처음부터 불공평을 체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어머니의 자랑과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특권적 지위를 누린 것이다.

 

그러면 왜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는가? 카인이 농부이고 아벨이 목자라는 직업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구약성경은 땅을 부쳐 먹고 사는 농경 생활을 가치절하하거나 유목 생활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유목 생활을 거쳐 약속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정된 농경 생활을 하기를 희구하였다. 더욱이 최초의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땅을 일구는 농부였기에 농부가 오히려 이상적 직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농경 생활과 유목 생활에는 인간의 두 가지 삶의 태도가 담겨 있다. 농부는 일정한 땅과 집을 소유하는 소유주로 살아간다. 반면 목자(牧者)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에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성경이 목자의 생활 방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면 이러한 비집착성과 개방성, 하늘을 향해 열린 마음과 초월을 향한 비상한 감수성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휴일이나 주말이 되면 광야에 나가 도시생활에서 잃어버린 무한과 영원의 그림자를 다시금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여 광야로 인도하시고 그의 가슴에 대고 말하리라고 한다(호세 2,16 참조). 하느님의 유혹이 이루어지는 곳, 하느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곳은 도시가 아니다. 자기 실존의 헐벗은 모습으로 무한한 하느님의 음성을 가슴으로부터 엿듣는 광야인 것이다. 유목 생활의 또 다른 장점은 생명과 늘 만난다는 것이다. 유목민의 광야에서는 생명과 교감이 이루어지지만, 도시에서는 기계화와 전산화로 비생명체와 상대하게 된다.

 

이러한 생활 방식의 차이가 제물을 바치는 태도의 차이로 나타났다.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쳤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때 수확의 맏배를 바쳐야 했다(탈출 22,28-29; 34,19-20 참조). 그것은 인간이 먼저 하느님께 첫 소출을 정성껏 바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사람은 하느님의 것을 훔친 도둑과 같다고 하는 탈무드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카인은 소출의 맏물을 바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것의 일부를 바쳤을 뿐이다. 하느님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이 삶의 전부인 아벨과 하느님이 자기 삶의 일부만 차지하는 카인의 차이가 결국 하느님의 선택을 결정한 것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결과가 하느님께 돌아간다.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10). 아벨의 피는 땅에 뿌려져 땅을 오염시키고 소출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아벨의 피가 땅을 오염시켜 카인이 에덴의 동쪽 땅으로 쫓겨났듯, 카인의 후예로 산 이스라엘 역시 땅을 잃을 것이다. 탈무드는 기원전 578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유로 살인, 우상 숭배, 부정한 결합을 들었다.

 

한편 카인이 뿌린 아벨의 피는 복수로 나타난다. 왜 복수를 아벨의 ‘피들’이라고 말할까? <미쉬나>에 의하면 아벨의 피와 그에게서 탄생했을 후손의 피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련하여 아우슈비츠의 한 생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600만 명의 희생자 외에도 더욱 공포스러운 일은 그들에게서 태어났을 유다인 어린이들, 그 후손이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인간의 잘못으로 수많은 미래 가능성이 죽임을 당한다. 오늘날 낙태가 그 대표적 예에 속한다. “하나의 생명을 구하면 마치 세상의 생명을 구한 듯하고 하나의 생명을 죽이면 마치 세상의 생명을 죽인 것과 같다”는 탈무드의 말은 곰곰이 새겨봐야 한다.

 

카인은 마침내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당한다. 그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에녹을 낳는다. 도시를 건설하고 아들의 이름을 빌어 그 땅을 ‘에녹’이라고 부른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본시 ‘hanokh’이고, ‘교육하다, 개시하다’는 뜻을 가진다. 카인은 과거의 죄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공간인 인간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다. 유다인은 스탈린그라드, 알렉산드리아, 티베리아 등 사람의 이름을 도시 이름에 갖다 붙이는 것을 꺼린다. 인간 중심의 이름 부여보다 신적 프로그램이 담긴 이름을 자주 사용한다. 예컨대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카인과 아벨, 그 이름에서부터 미래의 운명이 예고되어 있었다. 히브리어 ‘카나(qana, 창조하다)’에서 파생된 카인이란 이름은 ‘대장장이, 장인’을 의미하며, 장차 인간 문명의 창시자가 될 것을 암시한다. 아벨은 히브리어로 ‘hebel ’이며, ‘수증기, 연기, 허무’를 뜻한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의 한계를 잘 보여 주는 이름이다. 목자 아벨은 하느님 중심의 삶을, 농부 카인은 인간 중심의 삶을 대표한다. 카인의 이야기는 폭력이 인간 중심의 삶에서 발단하였고 인류 문명이 폭력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성경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하느님과의 관계에 비하면 그 다음이다. 창세기가 말하는 죄의 기원은 아담이나 카인의 경우 모두 하느님과의 관계에 놓여 있다. 모든 것의 중심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을 때,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훼손된다.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세상과 인간의 창조, 죄의 기원과 그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며, 신학대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5월호(통권 458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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