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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대홍수와 노아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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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39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대홍수와 노아의 계약

 

 

‘홍수’는 고대 근동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홍수를 인구 문제와 관련하여 설명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은 <아트라하시스 서사시(Atrahasis Epic)>이다. 이는 기원전 17세기 바빌론의 서기관 쿠 아야(Ku-Aja)가 1245절로 구성한 기록이다. 이 서사시에 홍수가 일어난 원인이 나와 있다. 신들이 자신들의 노동을 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지만, 인간의 수가 크게 늘어나 소음으로 시끄러워지자 홍수로 인간을 멸망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창세기는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와 달리 창조된 인간을 신들의 노동 대리역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로 설명한다. 홍수를 인구 조절을 위한 신적 통제 수단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악이 땅에 만연되어(창세 6,5 참조) 하느님께서 심판을 내리셨다고 이야기한다. 자연 현상을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윤리적 차원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러면 악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홍수 설화에 앞서 거인족 이야기가 등장한다. 거인족(나필족)은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이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하느님의 아들들은 어떤 신적 존재가 아니라 우월한 권력을 가진 특권층의 인간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파라오(창세 12,10-20 참조)나 다윗(2사무 11장 참조)처럼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여자를 취하는(창세 6,2 참조) 등 욕망대로 움직일 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도록 처벌하신다는 것이다. 거인족 이야기는 인간의 교만, 자기 강대성, 힘에 의한 타인 지배라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보여 준다.

 

결국 대홍수가 일어난 원인은 인간의 악이 세상에 많아진 탓이다(창세 6,5 참조). 구체적으로 세상이 타락하여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기(창세 6,11 참조) 때문이다. 폭력은 카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폭력이 홍수로 인한 심판의 근본 이유라면 과연 폭력의 기원은 무엇일까?

 

창세 1,22에서 물고기들과 새들은 번성하여 바다의 물과 땅 위를 채우도록 하느님께 복을 받았다. 인간 역시 번성하여 땅을 채우도록 복을 받았는데, 땅 위에 사는 짐승들은 ‘번성하라’는 말씀도 하느님의 복도 받지 못했다. 이러한 불공평한 축복을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은 동물의 복이 인간의 행위 결과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동물에게 땅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의 과일을 식량으로 주셨다(창세 1,29-30 참조). 이러한 초식 생활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들을 지배하라는 사람의 소명에 근본적 제한을 가한다. 인간은 동물에게 일을 시킬 수는 있어도 먹기 위해 그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동물에 대한 지배’는 폭력적 수성(獸性)을 풀의 연약함으로 무마하는 이른바 ‘부드러운 지배’이다. 그것은 폭력이 걸러지고 서로 죽이지 않는 평화로운 공존을 가리킨다. 이 질서가 깨진 것이 폭력의 기원이며, 홍수는 폭력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었다.

 

노아가 홍수 기간 동안 먹은 식량은 창세 1,29-30의 기준에 따라 풀(식물)이었을 것이다(창세 6,21 참조). 노아가 방주에 들인 동물은 홍수 기간 내내 살아서 종류별로 방주에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창세 8,19 참조). 노아가 초식의 계명을 온전히 지킨 것이 그가 의인이라 불린 이유일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대홍수로 인간이 죽고 노아의 가족만 살아남았으나 그 후손이 나중에 바벨 탑을 만들어 하느님을 거스른다면 홍수의 심판은 결국 무의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인간이 악을 저지르는 것은 심판으로도 근절할 수 없는 생래적(生來的) 현상임을 인정하신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창세 8,21)고 다짐하신다.

 

이처럼 생명이 악의 현실보다 소중하고 생명의 축복이 죄에 대한 징벌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생명은 창조의 근원적 복에 속하기에 하느님께서는 홍수가 끝나자 노아와 계약을 맺으신다. 이 계약으로 자연과 역사의 새로운 출발(창세 9,1-17 참조)이 가능해진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약의 표지는 무지개다. 그것은 태초의 혼돈 위를 비추는 우주적 질서와 안정성을 반복하여 확인시키는 상징이다.

 

최근에 상영된 영화 [노아]에서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노아에게 선과 악의 이중성을 부여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이 인간을 멸절하는 데 있다고 이해하여 며느리 일라가 낳은 두 손녀딸을 죽이려 하였으나, 차마 해치지 못하고 살려 줌으로써 인류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노아에게 선은 인간이 없는 유토피아적 세상을 위하여 인간을 멸절하는 것이었으나 인간의 후손을 허용하여 악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어긴 이 선택으로 노아는 자책하였으나 노아가 자손을 축복할 때 무지개가 떠올라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 인류 구원임이 드러난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반대로 이해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생래적으로 악한 면이 있음을 인정하시어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라는 창조 질서를 확인하게 하신다. 추위와 더위, 밤과 낮이라는 창조의 이중적 질서는 선과 악의 이중성을 지니고 사는 인간의 모습과 맞물려 있다. 선과 악의 기로에서 아담이 지식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악을 선택했다면, 노아는 하느님께서 주신 초식을 지속하는 선을 선택했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노아의 아버지 팔뚝에 감긴 뱀 껍질이 노아의 팔뚝에도 감기는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이는 노아와 그의 후손이 겪어야 할 악의 유혹을 상징한다.

 

한편 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신다. 그분은 창세 1,28에서처럼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라는 소명을 주신다(창세 9,1 참조). 그리고 창세 1,29과 달리 육식이 허용된다. 그러나 동물의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창세 9,3-4 참조). 살의 죽임과 먹음은 허용하되 피의 섭취는 금기시키는 이른바 ‘노아의 법’이 공표된 것이다.

 

창세기는 동물의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결국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는 폭력의 확대 현상을 시사한다. 생명 존중의 뿌리는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모든 생명 특히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는 데 있음을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준다.

 

지난 4월에 발생한 여객선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이 슬픔과 자책감을 느끼고 있다. 이 사건은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 풍조에서 배금주의에 빠진 어른들의 행태가 만들어 낸 전형적 인재人災다. 노아의 대홍수를 이겨 낸 생명의 힘과 하느님의 복을 믿기에 이 참극을 통해 생명 존중 의식이 각성되어 모든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며, 신학대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6월호(통권 459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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