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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콜카타, 고통과 사랑의 용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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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42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콜카타, 고통과 사랑의 용광로

 

 

인도는 천의 얼굴을 가진 나라다. 저마다의 체험과 관점에서 그려 낸 인도 여행기가 이 점을 말해 준다. 어디 인도뿐이랴! 사람이든 나라든 다양한 모습을 시시각각 다르게 보여 주는 것이 생명 교향곡의 본질이다. 그런데 인도의 경우는 생명의 용틀임이 다르게 느껴진다. 아직도 영향력이 있다는 카스트 제도와 최근 세계인을 경악시킨 끔직한 성범죄로 일그러진 얼굴 뒤에, 수많은 신화와 신전으로 치장된 영적 역사가 겹쳐 있는 것이다. 거리에서 걸인 철학자를 만나 대화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No problem”(문제 없어)을 외치는 릭샤 운전사에 대해 말하는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도 분명 인도의 단면일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인도의 모습은 가난과 질병과 오염과 소음과 무질서와 무더위까지 가세된 진흙탕이었다. 그런데 그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콜카타[Kolkata, 그동안 영국식의 캘커타(Calcutta)로 불렸으나 인도인에게는 언제나 콜카타이다]는 이미 사진에서 봐 온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구 말대로 현실은 늘 상상한 것 이상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공항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길에는 건축 공사가 한창이라 인도 경제의 활력이 보이는 반면, 콜카타의 도심에 위치한 마더 데레사의 ‘사랑의 선교회’가 운영하는 시설 주변에는 세월을 가늠하기 어려울만큼 낡고 시커먼 건물들이 소음과 공해와 인파 속에서 분노의 이빨을 드러내며 서 있었다. 영국이 지배하던 시절 인도의 수도였던 콜카타의 옛 영광은 건물의 뼈대에만 남아 있고 그 외관은 낡음과 썩음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었다(로마 8,20 참조). 인간의 내면이 늘 사랑으로 정화되고 새로워져야 하듯(2코린 4,16 참조), 인간이 만든 도시는 사람의 손길로 정비되고 보수되어야 보존이 가능하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인공물이든, 정지가 퇴화를 낳고 나태가 불모와 무질서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현장이었다.

 

‘죽어 가는 이들을 돌보는 집’[Nirmal Hriday: Home for the Destitute and the Dying, 본래 칼리 여신에게 바쳐진 건물이었기에 칼리가트(Kalighat)라고도 불린다]을 방문했을 때 여러 사람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봉사하는 한국 수녀님에게 들은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봉사자들이 선로변이나 길가에서 죽어 가는 이들을 발견해서 그곳으로 데려와 치료하고 보살펴 주는데, 벌레에 파먹혀 신체 일부가 훼손된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파리가 병자의 몸에 알을 낳고 그 알에서 부화된 구더기가 병자의 몸을 양분으로 취해 성충으로 자라는 중에 발견되어 실려 오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이다.

 

게헨나 골짜기가 사람의 시신을 버리는 쓰레기장으로 사용되었을 때, 성경은 구더기가 살을 파먹는 끔찍한 장면을 배경으로 지옥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마르 9,48 참조).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구더기가 파먹는 모습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옥일 것이다. 더욱이 그 구더기가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구더기에 의한 완전한 파멸을 의미한다. 생태학의 관점에서 보면 죽은 생명이 구더기의 밥이 되는 것은 먹이사슬의 선순환 관계를 드러낸다. 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이 그렇게 처참한 꼴을 당하는 것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지옥의 모습일 것이다. 니르말 흐리다이(Nirmal Hriday)는 죽음의 구더기가 활개 치는 현실의 지옥을 사랑으로 치유하는 생명의 신전이었다.

 

구더기가 들끓는 병자를 정성껏 씻기고 그에게 음식을 먹이면 어느새 그가 원기를 회복하고 치유되기 시작한다. 각국에서 온 젊은 봉사자들이 음식을 먹이고 안마해 주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사랑의 감동이 잔잔하게 밀려온다. 무덥고 열악한 콜카타의 환경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자들을 돌보는 봉사자들에게 위로와 보람은 무엇일까? 그것은 반쯤 죽은 이들이 회복되어 미소를 짓거나 봉사자들을 반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봉사자들은 병자들을 돌보면서 자신의 상처와 아픔도 치유된다고 말한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과 절망의 진흙탕 속에서 사랑과 봉사의 연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인 다야 단(Daya dan)에서는 지적 장애나 육신의 장애를 지닌 아이들이 힘겹게 누워 있다가 낯선 방문객이 건네는 손길을 반갑게 잡아 주었다. 작은 얼굴의 절반을 차지할 것 같은 아이들의 까맣고 커다란 눈망울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우리의 손을 꼭 잡은 아이들의 눈망울은 잊을 수 없는 형상으로 마음에 새겨진다. 아마도 그 모습을 잊지 못해 일부 봉사자는 해마다 그곳을 다시 찾는 것이 아닐까!

 

콜카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달랐다. 삶의 불편과 고통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봉사자와 수녀들의 사랑이 혼란스러운 도시를 지탱하는 기둥처럼 느껴졌다. 그러기에 봉사자들 사이에 연대의식과 동료애와 친밀감이 자연스레 생겨난다. 거기서 만난 한 아가씨는 장기 봉사자로 일하다가 20년 연상의 단기 봉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다. 일상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사랑의 체험이 콜카타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지금쯤 그녀는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Varanasi)로 가서 시신이 떠다니는 갠지스 강을 바라보며 사랑의 가능성과 미래를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고통과 가난의 한복판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세상의 기준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열려 있는 순수한 사랑의 발로인 셈이다.

 

이렇듯 콜카타의 니르말 흐리다이에서 만난 세상은 일상의 그것과 차이가 많았다. 세상에서 버림받아 의존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과 그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버려진 이와 장애인을 돌보는 시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꽃동네를 방문하는 데 반대한다. 장애인이 재활하고 자립하도록 도와줘야지 수용소에 가두듯 시설에 수용하고 퇴원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병자나 장애인을 올바로 돌보기 위해서는 재활과 사회 복귀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고통과 비참을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동일시하고, 그것을 그저 수용하게 만드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꽃동네나 사랑의 선교회의 보호 시설은 병자들을 항구적으로 수용하여 돌보는 것을 지향해서는 안 되고, 그들이 시설에서 나가 새 삶을 일구게 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콜카타에서 만난 이들에게는 재활과 사회 복귀를 말하기에 앞서 생명의 회복과 유지가 우선인 듯 보였다. 그들이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라고 외친 예리코의 맹인처럼, 생명을 지향하는 자세를 적극적으로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하며 앉은뱅이 맹인을 일어나 걷게 하시고 당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치유요 하느님 앞에 선 온전한 주체의 새로운 탄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콜카타에서 만난 사람들은 구조적 가난과 질병과 사회적 무관심으로 피 흘리며 쓰러진, 강도 만난 이와 다를 바 없었다(루카 10,30 참조). 그들에게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 준 따뜻한 돌봄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니르말 흐리다이와 꽃동네는 생명을 스스로 부지하지 못하거나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이들을 끌어안고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강도를 만나 피 흘리는 이가 치유되어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준비 과정은 있어야 한다. 동시에 강도짓이 재발하지 않도록 불의한 사회 구조를 뜯어 고치는 일도 요구된다. 고통은 숙명처럼 감싸 안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원인을 개선하거나 제거하는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한다. 콜카타는 고통의 한복판에서 타오르는 사랑의 용광로처럼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사랑의 불씨와 영감을 전해 주고 있었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며, 신학대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9월호(통권 462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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