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에바 슈츠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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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26 ㅣ No.1186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에바 슈츠 수녀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원산 수녀원, 1899년 4월 10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교구 베른리이트
세례명 : 오이게니(Eugenie)
첫서원 : 1926년 8월 30일
한국 파견 : 1926년 9월 4일
소임 : 부원장, 부수련장, 고산, 회령, 함흥 분원장, 재봉방 책임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원산 수녀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8월 10일, 옥사덕 수용소


에바 슈츠(Eva Schutz, 1899-1950) 수녀는 1899년 4월 10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교구의 베른리이트(Bernlied)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모가 그녀와 여동생을 데려다 키웠다. 그녀는 툿찡(Tutzing)에서 초등학교와 중등실업학교를 졸업하였고 뜨개질과 재봉에 흥미를 느껴 재봉사를 직업으로 선택했다. 수습기간 3년을 마치고 기능사 시험까지 통과한 후 뮌헨에서 가정부 생활을 하다가 스무 살에 독립하여 툿찡에서 재봉일을 시작했다. 1924년 2월 12일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로 보낸 입회 청원서는 바로 받아들여졌다. 에바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보낸 그녀는 1926년 8월 30일에 첫서원을 했다.

에바 수녀의 첫 소임지는 설립 준비를 하고 있던 원산 수녀원이었다. 1926년 9월 4일, 첫서원을 한 지 닷새 만에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그녀는 1926년 10월 동료 수녀들과 함께 한국에 도착하여 1925년 11월 원산에 도착한 네 수녀와 합류했다. 1927년 6월 6일 원산 수녀원이 정식 원장좌 수녀원으로 승격되자 그녀는 밀려드는 한국인 지원자들을 담당했다. 열다섯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의 한국인 지원자가 이미 열여섯 명이나 되었다. 한국 처녀들에게 낯선 유럽식 생활방식에 익숙해지도록 지도하는 한편 수도생활을 꼼꼼하게 가르쳐나갔다. 한국 수녀들은 상냥하고 친절한 마음씨를 가진 그녀를 어머니같이 따랐다. 한편 그녀는 수녀원에 재봉실을 열어 한국 여성들에게 양장과 제의 제작 및 수선 그리고 뜨개질과 자수를 가르쳤다. 재봉실에 일거리가 많았음에도 주일 오전에는 수녀원에서 부인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쳤으며 오후에는 한 시간가량 떨어진 마을에 가서 교리수업을 하였다.

1931년 부원장으로 임명된 에바 수녀는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녀는 주일에만 공소를 찾아가거나 개별적으로 여성들을 방문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한 한국인 청원자와 함께 평일에도 오후에 비어 있는 수녀원 유치원으로 여성들을 불러 모아 진도에 따라 반을 나누어 교리를 가르쳤다. 그들 대부분이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한마디 한마디 반복하여 가르쳐야 했다. 그러나 애쓴 보람도 없이 다음 시간이면 대개 배운 것을 몽땅 잊어버렸고 그때마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에바 수녀는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 건강이 나빠졌다. 『원산 수녀원 연대기』에는 그녀의 심장병을 언급했지만, 직접적인 원인이 과로였음은 거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했으며 기회가 닿는 대로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들을 하느님께 이끌었다. 그녀는 타고난 선교사이기도 했다. 1933년 3월 19일 원산 수녀원에서 처음으로 설립한 고산 분원장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에바 수녀는 폐병까지 얻은 상태에서 1938년에는 회령 분원장 그리고 1943년에는 함흥 분원장을 맡으며 선교 일선에서 헌신했다.

본격적인 시련은 1945년 8월, 해방 이후에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소련군정은 원산 수녀원이 운영하고 있던 유치원과 해성학교와 호수천신학교를 접수했다. 수녀원의 수입은 완전히 끊겨 소련군 장교 부인들을 상대로 재봉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갔다. 뛰어난 여성복 재단사였던 에바 수녀가 함흥에서 급히 원산으로 불려왔다. 그녀의 재봉 솜씨에 탄복한 장교 부인들의 주문이 쇄도하였으므로, 그녀의 재능은 어려운 수녀원 생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수녀는 매사를 정확하고 야무지게 처리하여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1949년 5월 11일 원산 수녀원이 폐쇄되던 그 밤에도 에바 수녀는 침착하게 고객들이 맡긴 옷감과 완성된 옷가지들을 일일이 확인해가며 주인들의 이름표를 붙인 뒤 자신을 체포하러 온 보위부원들에게 옷 주인을 찾아주라고 부탁했다.

 

1949년 5월 11일 원산 수녀원에서 체포되어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된 에바 수녀는 석 달가량 수감되었다가, 8월 5일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자강도 전천군에 위치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옥사덕 수용소에서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디오메데스 메퍼트(Diomedes Meffert, 1909-1998) 수녀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증언했다. “수녀님은 체포되기 전에도 이미 병약했고 특히 심장이 약했습니다. 3개월간의 수감 생활이 수녀님의 건강을 매우 해쳤습니다. 수용소로 올라오다 찌는 듯한 8월의 더위를 먹고 길에서 졸도를 했는데, 장뇌 주사를 맞고 나서야 소에 태워져 무사히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서서히 회복되어 다시 바느질에 전념했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부종과 위장 장애 그리고 장 질환으로 1949년 성탄절 무렵부터는 전혀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냉수욕과 이런저런 약초를 써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이 부질없었습니다. 심한 부기에 이어 갑작스러운 탈수 현상이 번갈아 일어났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주에 수녀님의 심하게 부은 다리 한쪽이 짚대에 찔렸습니다. 밤낮으로 진물이 흘러나왔고 결국 감염으로 이어졌습니다. 열이 자꾸 올라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이 달궈진 석쇠 위에 누워 순교했듯이, 수녀님은 8월 10일에 준비된 마음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베일과 화관을 씌우고 하얀 조팝나무꽃 사이에 수녀님의 시신을 묻었습니다.”

* 자료출처 : 덕원의 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북한에서의 시련(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10년), 원산 수녀원사(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1988년)

[분도, 2013년 여름호(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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