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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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대감마을과 주어사: 교회의 요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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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93

대감마을과 주어사 - 교회의 요람지

 

 

양평 읍내에서 한강을 넘어 광주 곤지암으로 가다 보면 세월 초등 학교를 지나 대감마을(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곳에서 좀더 남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 골짜기에 주어말 동네가 있고 그 뒤로 주어사(走魚寺, 여주군 산북면 하품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높은 산자락이 바로 앵자봉이며, 그 너머에는 유명한 천진암(天眞菴)이 자리잡고 있다. 대감마을은 실학자로 유명한 이익(李瀷)의 제자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 살던 곳으로, 초기 교회에서 유명한 이벽(요한),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이 모두 권철신의 제자였다.

 

1779년 겨울, 권철신과 제자들이 주어사를 찾은 이유는 대감마을에서 가까운 이곳에 모여 학문을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때 이벽이 주어사 강학 모임을 찾아가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 후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고 돌아오도록 했으며, 1784년 가을 무렵에는 이승훈이 전한 교회 서적들을 들고 대감마을로 스승 권철신을 방문하여 교리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런 다음 교회가 창설되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과 류항검(아우구스티노)이 대감마을에서 권일신에게 세례를 받고 각각 충청도와 전라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으니, 대감마을과 주어사는 곧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라고 할 수 있다.

 

앵자봉 너머의 천진암은 일찍이 이벽과 정약용이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였다. 이곳은 1970년대에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1979년에는 경기도 포천에서 이벽의 유해가 이장되었다. 이어 1981년에는 화성군 반월면에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인천 만수동에서 이승훈의 유해가, 대감마을 뒷편의 효자봉 자락에서 권철신, 권일신의 유해가 각각 천진암으로 이장되었으며, 1981년 12월에는 경기도 광주 배알미리(현 하남시)에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의 유해가 간신히 수습되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반면에 대감마을과 주어사는 점차 교회사에서 잊혀져만 갔다. 또 초기 교회의 인물 중에서는 정약종, 유항검만이 훌륭한 순교자로 남아 있을 뿐, 이벽과 권일신의 신앙 증거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고, 권철신을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용, 이존창 등은 배교자의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영원히 신앙을 버렸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조선 최고의 학자 정약용이 말한 "만리 밖의 성현"은 과연 누구였는지?

 

슬프구나 우리 나라 사람들, 비유하니 주머니 속에 사는 것과 같네.

성현(聖賢)은 만리 밖에 있으니, 누가 이 몽매함을 열어 줄 것인가?

머리 들어 세상을 바라보니, 뜻을 깨달은 이들이 드므네.

모방하기에만 급급하니, 오묘한 것을 가려낼 겨를이 없구나.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시문집 중에서)

 

[사목, 1999년 5월호, pp.100-102,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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