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강론자료

2016-0221.....사순 제2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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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6-02-20 ㅣ No.1990

사순 제2주일 (다해)

창세기 15,5-12.17-18        필리피 3,17-4,1       루카 9,28-36

2016. 2. 21. 이태원

주제 : 하느님의 모습을 보는 사람으로서.......

사람은 현실 생활에서 눈으로 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이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계산할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안다고 말하는 지식이나 확신은 대부분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에서 만들어질 것입니다. 안다는 것의 대부분이 사람의 눈과 귀와 관련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눈과 귀이기는 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사람의 눈이나 귀는 거짓과 쉽게 타협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볼 수도 있는 존재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눈과 귀로 연결되는 지식의 내용이 항상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궁금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보고, 똑같이 들어도 사람들의 삶에 똑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는 지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서글픈 일입니다.

 

오늘 사순 제2주일,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묵주기도에서,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빛의 신비4에서 묵상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빛의 신비4단은 우리 주님의 모습이 일반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변하셨다는 현성용(顯聖容)’에 관한 내용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얼굴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셨는데, 그 모습이 하느님이심을 묘사하는 거룩한 모습이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얼굴 모습아 어떤 것이었는지, 오늘 루카복음은 우리에게 자세하게 전해주지 않습니다.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얼굴모습이 달라지고 옷이 하얗게 번쩍였는데, 그 모습에 놀라서,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베드로는 엉겁결에 엉뚱한 소리를 했다고 전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하고 싶었기에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그 말을 듣는 우리는 신앙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둘러보면 산이라고는 없는, 넓은 평야에 우뚝 솟은 산, 이태원에 사는 우리가 아는 남산의 높이보다 2배쯤 되는 현실의 타보르산에 지금은 수도원도 지어져있고 거기에는 머무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오늘 복음이 전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을 때에는, 현실과 같거나 비슷한 환경도 아니었을 텐데, 베드로사도는 스승님과 모세와 엘리야야와 살았으면 좋겠다는 황당무계한 계획을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지식에 근거하여 얼마나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세상에 사는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이 어떠한지 모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죽지 않게 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이었음을 구약성경, 탈출기3320절은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렇지만 구약시대의 백성이 아닌 현실에 사는 우리가 구약성경의 말씀을 똑같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궁금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이끌었던 모세를 살려두시기 위해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탈출기는 적습니다만, 그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할 것이고, 내 눈으로 봐야 내가 하느님을 더 잘 따를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심각한 결과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데,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대하는 일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오늘 창세기의 말씀이 전해주는 내용을 따라, 아브람을 특별히 그리고 무조건 선택하신 후,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기는 하지만, 그에게 넓은 땅과 후손을 많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어찌하여, 아브람이 무슨 일을 했다고 이런 축복을 입게 되었는지는 전해주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움직이실 것인지 그 행동방식을 알지 못하고 예상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려고 애써야 하며,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 대로 실천하려는 노력은 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미사에 함께 한 여러분 중에서 제가 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주셨을 축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기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 있고, 우리가 어떻게 살면 하느님께서 만사를 제쳐놓고 우리에게 당신의 축복을 내려주실 것인지, 그 관계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준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기준을 무엇이라고 알고 따르십니까?

 

우리가 미사에 올 때마다, 성체(聖體)로 만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겠습니까? 하느님이실까요? 그 하느님을 대하는 우리는 과연 어떤 자세를 드러내야 하는지 올바른 기준을 배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니지만,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하느님께 얼마나 가까이 다가서려고 노력하는지도 살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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