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38: 모든 존재는 삼위일체 관계성 안에서 의미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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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4-20 ㅣ No.1578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8) “모든 존재는 삼위일체 관계성 안에서 의미 지닌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모든 존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취를 지니고 있기에 형제적 관계성을 지닌다고 가르친다. 사진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가 예루살렘 겟세마니 동산의 올리브 나무를 가꾸고 있다. [CNS 자료 사진]

 

 

개인 혹은 개별자는 모든 존재와의 연결 고리 안에서 그 가치와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모든 존재와의 형제적 관계성은 이 핵심적인 부분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대중이나 어떤 특정한 류(類) 혹은 무리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특히 인간 피조물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인격적으로 만나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요한 둔스 스코투스의 ‘개별성의 원리’(haecceitas)가 말하는 바이다. 복음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예수님의 치유 장면들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와 상대하시면서도 인간 개개인 안에서 치유가 발생하게 한다는 점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노자 「도덕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자취

 

그렇지만 이 개별자 혹은 개인의 중요성은 상호성 혹은 관계성 안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 사화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거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접한 이들은 한결같이 그분과의 관계성에 들어선 이들이거나 다른 이웃과의 관계성에 들어선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둔스 스코투스도 개별성의 원리를 말하면서 결국은 존재들의 상호성과 관계성에서 개별체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모든 존재가 삼위일체의 자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드러난다. 노자는 도덕경 4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으며, 이는 삼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는다) 어찌하여 노자가 ‘셋’까지 언급하고 그다음 만물 창조를 말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 안에 부여해주신 삼위일체의 자취, 즉 관계성과 함께함의 자취가 드러나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억측 아닌 억측을 해본다.

 

인류 역사 안에서 대중 개개인에게 부여되어있는 이 영감을 일깨운 이들을 우리는 ‘중요한 무리(critical mass)’라고 부른다. 이들의 목적은 그들이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앞서거나 뛰어난 영웅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니라 자신과 더불어 다른 모든 존재가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살게끔 일깨우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 클라라, 마하트마 간디, 마르틴 루터 킹, 마더 데레사 등과 같은 이들은 우리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느님 은총에 의해 ‘존재의 위대한 사슬’이라는 진정한 현실을 깨달아, 자신들의 사명인 다른 모든 이들을 이 존재의 고리 속으로 들어서도록 초대한 이들이다.

 

 

삼위일체의 패러다임 회복 절실

 

리처드 로어(Richard Rohr, OFM) 신부가 말하는 죄의 정의는 ‘삼위일체로부터 흘러나와 모든 존재를 향해 흘러들어 갔다가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영원한 사랑의 역동적 흐름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으로부터의 본질인 관계성 안에서의 나눔과 ‘더불어 현존함’을 막는 것은 모두 죄라는 말이다.

 

리처드 로어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하느님 존재의 본질이자 우리 존재의 본질인 삼위일체의 패러다임을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우리 모두에게 호소한다. “우리의 옛 교리서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대신덕(對神德)’이 신적 존재의 본질이며 ‘하느님 생명 자체를 나누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중세 교회 역시도 이 대신덕이 먼저 개인에게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 그리고 인류에게 전체로서 주어진 것임을 주장하였다.”

 

 

희망의 덕, 개인에 앞서 전체에게 적용

 

이는 교회의 위대한 두 학자,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에게서 예시된다. 이들은 희망의 덕이 개인에 앞서 먼저 전체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희망을 외떨어진 개인 안에서 생겨나게끔 하면서 그 개인은 절망과 벌을 향해 나아가는 우주와 사회, 그리고 인류 안에서 표류하게 만들었다.

 

사회가 먼저 다른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유일하게 지속하는- 이 대신덕을 공동의 차원에서 누리지 못한다면 개인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누린다는 것, 혹은 심지어 이 대신덕을 설교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1코린 13,13 참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커다란 문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우주적 희망의 메시지가 아닌 종말과 아마겟돈이라는 위협적인 메시지만을 전해주었다. 삼위일체로서의 하느님은 사회 전체에 희망을 주신다. 왜냐하면, 이 희망은 항상 불안정한 개인의 이랬다저랬다 하는 행위가 아닌 존재 자체의 본질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4월 18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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