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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생명의 문화를 향하여: 사람을 죽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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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01 ㅣ No.842

생명의 문화를 향하여 - 사람을 죽이지 마라

 

 

현대는 첨단 생명과학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생명과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위협이 생겨났다.

 

경제 논리에 따라 무고한 생명이 죽음으로 내몰리기도 하며, 직 · 간접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일들이 흔히 일어나고 있다. 강도짓의 결과이든 분노의 표출이든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하는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마태 5,21).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이 말씀은 직접적이고 고의적인 살인을 중대한 죄로 금하고 있다. 교회는 중대한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죽을 위험에 놓이게 하는 것뿐 아니라, 위험에 놓인 사람이 청하는 도움을 거절하는 것도 금한다. 또 어떤 사람을 간접적으로 죽이려는 의향으로 행해지는 모든 행위를 금한다. 적합한 이유 없이 죽음을 초래하는 행동을 했다면, 살해 의도가 없어도 중죄이다.

 

그러나 자기의 생명을 지키려는 정당방위의 경우, 곧 부당한 공격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경우에는 살인죄가 아니다.

 

 

카인과 아벨

 

창세기에서 카인이 동생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서 쳐 죽였다. 주님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을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을 반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모른 체한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고 꾸짖으시면서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하시고 카인을 쫓아내신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이라는 카인의 하소연을 들으시고, 주님께서는 카인을 죽이는 사람은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자비로운 하느님께서는 벌을 내리시면서도 카인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다. 죄인을 죽이기보다 바로잡기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살인이 또 다른 살인 행위를 통해서 처벌받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카인과 아벨의 제사를 차별하여 하나는 돌아보고 다른 하나를 무시한 것은, 카인이 하느님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따랐기 때문이다. 카인은 착한 동생을 본받아 마음을 바꾸는 대신 질투하고 마음이 상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질투는 다른 사람의 선을 보고 상심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문제를 따지면서 힐문하신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카인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아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는 올바로 나누지 않고 올바로 살지 않았으므로, 그의 봉헌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카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마치 간섭하는 말처럼 받아들였고, 의로운 아우를 질투 때문에 공연히 미워하고 살해함으로써 죄인이 된 것이다.

 

이렇게 아우에 대한 시기와 질투, 분노에 압도되어 동생을 살해한 카인의 모습에 비추어 비인간적 경쟁 사회로 치닫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심은 모든 사람이 자기 형제를 지키는 사람들임을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서로에게 맡기신 것이다.

 

카인에게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는 하느님의 물음은 오늘날 인간이 자행하는 생명에 대한 공격의 범위와 위험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여성의 선택권, 삶의 질 향상, 난치병 치료를 위한 배아줄기세포 연구, 안락사라는 이름의 고통의 마감 등…. 때로는 감정에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과학적 지식에 근거한 합리적인 주장으로 초기 또는 마지막 단계에 있는 생명을 말살하는 일련의 범죄들을 은폐하려는 경향이 오늘날 팽배해 있다. 연대성을 거부하고 효율성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사회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 큰 관심과 사랑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생명은 쓸모없으며, 사회적 짐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여 수용하기를 거부한다.

 

 

피임과 낙태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 1,5).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제가 땅 깊은 곳에서 짜여질 때 제 뼈대는 당신께 감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시편 138,15).

 

하느님께서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신 인간의 생명은 임신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신성하다. 그럼에도 여성의 선택권이나 자율권, 삶의 성취에 방해되는 원치 않은 임신의 예방이나 중단이라는 목적으로 피임이나 낙태를 이용하고 있다.

 

안전한 피임은 효과적인 낙태 예방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피임이 성행하는 곳에서는 낙태 조장 문화가 지배하며, 피임이 실패할 경우 낙태를 선택할 것이다.

 

교회는 인간의 생명을 임신하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낙태는 살인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침해하는 것이다. 목적이나 수단으로서 행한 고의적이고 직접적인 낙태는 물론이고 낙태를 돕는 협력도 중죄이다.

 

 

인공 생식 기술과 태아 진단

 

생명 탄생에 기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공 생식기술들이 실제로는 생명 파괴 행위를 조장하기도 한다. 필요한 수보다 많이 생산된 잔여 배아는 폐기하거나 실험에 사용한다. 의학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이런 실험은 인간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단순한 생물학적 재료의 수준으로 격하시킨다.

 

임신되는 순간부터 인격체로 대우를 받아야 하는 배아는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보호받고 보살핌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배아의 생명과 온전성을 지키고 치료할 목적으로 행해지는 경우에만 산전 진단은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

 

인간은 생명의 출발점에 이미 유전적 개체성이 결정되어 있으며, 한 인간 삶의 모험은 임신 직후부터 바로 시작된다. 교회는 비록 수태의 결과가 하나의 인간인지 아닌지 확정지을 수 없는 초기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런 인간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중죄로 규정하고 있다.

 

잡목 속에 움직이는 것이 동물인지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을 때는 사냥꾼이 총을 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과거에 수정란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안락사와 자살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대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는 불치병 환자와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죽음을 앞당김으로써 고통의 뿌리를 제거하려는 유혹이 크다. 안락사는 환자의 고통에 대한 그릇된 동정심과 아울러 때로는 효과도 없고 개인적으로 큰 비용이 드는 부담을 줄이자는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정당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병자 또는 임종을 목전에 둔 사람의 목숨을 고의적으로 끊는 직접적 안락사는 방법과 동기가 어떻든 살인죄이다. 합의로 이루어진 자발적 안락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은 많은 유혹과 위험과 위태로움 속에 있다.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따돌림으로 시달리거나 삶에서 낙오하고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강박에 몰려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부자들도 자살을 선택하는 일이 빈번하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의 관리자이지 소유주가 아니므로 우리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자살은 가정, 국가, 인류 사회와 맺는 연대 관계를 부당하게 파괴한다. 또한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에 어긋나는 것이다.

 

 

대응 방법 모색

 

무죄한 사람을 일부러 살인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황금률과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중대하게 거스르는 것이다. 이러한 살인을 금지하는 법은 예외 없이 유효하며,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261항).

 

“서로 남의 짐을 져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맡기신 의무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그분의 모습이고 각인이며, 그분 생명의 숨결을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과 죽음은 하느님 손에, 그분 권능에 달려있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신명 32,39).

 

주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상기시킴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요구하시며 살의를 품은 분노와 증오의 부도덕성을 고발하신다. 이웃에 대한 증오는 이웃이 잘못되기를 바랄 때 죄가 된다.

 

인간 생명의 존중과 증진에는 평화가 필요하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다른 사람보다 못한 점이 있기에 남과 비교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 예외 없이 기가 죽으며, 시기와 질투로 비뚤어지며, 불행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사랑의 하느님 작품인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독특한 존재이며,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이다.

 

어떤 일에 종사하든 남과 비교하거나 경쟁하기보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과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요, 행복의 지름길이다. 입시, 취업, 승급 등 도처에서 친구나 동료가 경쟁 대상이 되고 극단적인 경우 자살과 직 · 간접적인 살인으로 삭막해지는 요즈음 어느 곳보다도 교회 안에서 인간적이고 따뜻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려는 노력이 시급한 때이다.

 

* 구인회 마리아 요셉 - 가톨릭 생명윤리연구소 소장, 한국생명윤리학회장을 맡고 있으며, “생명윤리의 철학”, “생명윤리 무엇이 쟁점인가”, “죽음과 관련된 생명윤리적 문제들” 등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경향잡지, 2011년 5월호, 구인회 마리아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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