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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칼럼: 신앙 행위와 비결정론적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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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1-11 ㅣ No.465

[과학칼럼] 신앙 행위와 비결정론적 세계관

 

 

지난달에 저는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사주, 음양오행 분석법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뉴턴의 이 결정론적 세계관은 등장 이후 수백 년간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반으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결정론적 세계관은 20세기에 등장한 양자물리학의 세계관인 ‘비결정론적 세계관’이 무너뜨립니다. ‘자연의 본성상 한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양자물리학의 핵심 원리인 불확정성 원리입니다. 더 나아가서 양자물리학의 가장 수수께끼 같은 내용인 ‘입자-파동 이중성’과 ‘중첩 원리’ 등으로 인해 우리가 아무리 역학 법칙을 정확히 알더라도 한 물체의 미래의 운동 상태를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한 물체의 미래의 운동 상태에 대해 확률론적인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비슷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난 시점인 초기 조건’과 ‘사주, 음양오행의 기본 법칙’을 통해 한 사람의 미래의 운명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 역시도 혹시 잘 들어맞지 않는 세계관이 아닐까?

 

만일 결정론적 세계관이 정말 잘 맞는다면 우리는 왜 굳이 시간을 들여서 기도하는 것일까요? 기도를 하든 안 하든 어차피 미래의 운명은 정해져 있을 텐데요. 만일 결정론적 세계관이 정말 잘 맞는다면 우리가 신앙을 가지든 안 가지든 상관없이 우리의 길흉화복은 결정되어 있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미래의 삶이 바뀔 가능성이 없고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굳이 성당을 다닐 필요도 없고, 묵주기도를 바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TV 드라마를 보는 것이 더 즐겁겠죠.

 

우리의 신앙 행위는 바로 비결정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행위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청원을 들으신 하느님의 개입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등장한 양자물리학이 바로 이 비결정론적 세계관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전자나 원자 등 물질의 미래 예측도 원리적으로 불가능한데 하물며 인간의 미래 예측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 깊이 파고든 결정론적 세계관에 입각한(점을 치는 행위를 포함한) 여러 미래 예측 프로그램들에서 벗어나서 우리에게 ‘시간의 화살’을 허락하시고 미래를 유일하게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그분께 우리의 미래를 내맡겨 드리는 것이 가장 이성적이고 적절한 행위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신앙 행위는 결코 미신이 아닙니다. 현대 양자물리학의 시대에서 가장 합리적인 행위입니다.

 

[2022년 11월 6일(다해)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서울주보 7면, 김도현 바오로 신부(예수회, 대구 동촌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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