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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34: 피임이 과연 여성을 해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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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28 ㅣ No.1563

[이광호 소장의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 (34) 피임이 과연 여성을 해방했을까


피임약 뒤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1960년대에 피임약이 개발되면서 여성이 임신할지 말지, 또 임신 시기를 결정할 수 있게 됐기에 이 약이 여성 해방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목소리가 크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 통념은 피임산업과 페미니즘, 피임교육 단체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피임약이 여성을 해방하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 내가 이중피임을 하게 된 이유는 임신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처음에는 콘돔을 사용했지만, 성관계가 반복되면서 불안감은 커졌고, 피임률을 높일 수 있는 피임약을 떠올렸다. 먹는 것이기 때문에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보니 많은 사람이 이 약을 복용하고 있으며 부작용이 적다고 했다. 안심하고 복용했다. 그러나 피임약이 몸에 해를 끼치지 않고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피임교육 단체는 이중피임을 하라고 가르친다. 남자는 콘돔을, 여자는 피임약을 복용하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피임약이 개발되던 당시에는 피임약이 임신 부담에서 완전한 해방을 선사해줄 거라는 장밋빛 환상이 있었지만, 100% 완벽한 피임이 없다는 사실이 여러 사례에서 확인됐기 때문이다. 항암제가 개발될 당시에는 10년 안에 암이 정복된다는 환상이 생겼다가 사라졌고, 줄기세포가 나왔을 때 모든 질병 정복된다는 환상이 들끓었지만, 치료제로 주입된 줄기세포가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된 후에는 그 환상이 사라졌다. 방송과 인터넷에 산재한 피임약에 대한 긍정적 정보를 누가 만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약을 보니 개수가 많고 복용법은 매일 같은 시간에 먹어야 하고, 하루라도 안 먹으면 효과가 감소한다고 적혀 있었다. ‘과연 매일 먹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휴대폰 알람을 맞춰놓았다. 저녁 시간이 약 먹기에 편할 듯싶어 복용 시간을 정했지만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약속이 있을 때면 알람을 못 들을 때도 있었고, 술자리에서 음주하고 먹거나, 같이 있는 사람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먹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먹어야 피임률이 높아지니 열심히 먹었다. 피임약을 먹으면서 한편으론 뿌듯하고 대견함을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참 한심하고 우습다. 피임을 남자 친구에게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나도 스스로 몸을 지키자’는 생각이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피임약을 먹은 초기에 느꼈던 뿌듯함과 대견함은 피임이라는 신화(神話)가 주는 일시적인 만족감이다. 뱀이 먹으라고 한 열매를 보고 하와가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 거짓 행복인데, 현실에서는 이 감정이 실망과 괴로움으로 바뀐다. ‘나도 스스로 몸을 지키자’는 바른 생각이나, 성관계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은 신뢰와 책임의 원칙이지 약이 아니다. 원칙을 따르면 보호를 받지만, 벗어나면 악의 공격권에 노출된다.

 

피임약은 오로지 피임률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남자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피임약 먹고 있어? 피임약이 피임률이 높으니 콘돔 빼고 성관계를 해보자.” 콘돔 사용 시 남녀의 성기 민감도가 떨어지므로 이런 제안을 했을 때, 나는 거절할 수 없어서 그에 응했다. 나로선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지만, 남자 친구는 나와는 달리 많이 느끼고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후 남자 친구는 콘돔을 계속 사용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의 반응을 보며 콘돔을 사용하자는 말을 못했다. 어느새 당연하게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고, 마음 놓고 질내사정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정말 억울했다. 피임약을 통해 남자 친구가 나를 성적 욕망의 도구와 노리개로 이용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임신에 대한 걱정으로 피임약을 먹으며 괴로운 삶을 사는데, 성관계 때마다 여자 친구에 대한 배려는 없고 자기 쾌락에만 몰두하는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때 이 여성은 무슨 감정을 느꼈을까? 처절한 배신감이다.

 

나는 많은 불편함과 고통을 감수하면서 피임약을 먹는데, 남자 친구는 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자신만의 쾌감만을 중시했다. 나는 성관계를 하면서 내 존재를 다 내어주면서도 존중받지 못하는데, 왜 나는 정성을 다해 알람이 울리면 피임약까지 먹어야 할까. 남자 친구와 왜 성관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남자 친구한테 콘돔을 사용하라고 말을 하니 마지못해 하긴 했지만, 그전과 비교하며 민감도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 말을 들었을 때마다 나는 실망스러웠다.

 

남자 친구는 이 여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도구로 사용한다. 남자 친구에게 물건 취급을 당하는 여성은 존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남자 친구가 나를 돈 안 줘도 되는 창녀 취급하는 것 같다”고 했는데 정확한 인식이다. 고통스럽지만 인정해야만 이 구렁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본인만 생각하는 남자 친구의 태도에 대해 걱정만 쌓기엔 답답해서 내가 겪는 부작용도 말을 했었다. “생리가 끝나고도 피가 조금씩 나오고 색도 이상하다. 몸도 매우 아프다. 부작용이 아닐까?”라는 말을 했지만 남자 친구는 딱히 도움되는 행동이나 말은 없었다. 나를 배려해주고 존중해주기를 바랐지만 내가 도움을 청하면서도 그 도움을 받고 싶지 않은 이상한 마음이 올라왔다. 결국, 헤어졌고, 나는 콘돔과 피임약을 둘 다 사용하면서 성관계를 하면 안전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상처만 두 세배로 받았다.

 

‘도움을 청하면서도 그 도움을 받고 싶지 않은 이상한 마음’이란 뭘까? 이미 남자 친구와의 관계가 내적으로 단절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성관계는 하고 있지만, 정신적 영적으로는 끊어졌고, 이런 관계는 곧 결별로 이어진다. 헤어지지 않고 성관계를 이어가더라도 사실은 죽은 관계이며, 이 상태에서 임신이 발생하면 남자 친구는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친다.

 

여성을 해방하는 것은 신뢰와 책임이지 매일 먹어야 하는 알약이 아니다. 그 신뢰와 책임은 복지 선진국이 그러하듯 남성과 국가가 제공해야 한다. 여성에게 피임약을 먹이고, 그런 여성이 깨인 사람인 것처럼 포장하는 건 국가와 남성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직무유기이며, 이것이야말로 여성 차별이다.

 

‘피임약이 여성을 해방한다’는 문구는 간결하므로 선동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은 위 사례처럼 깊고 복잡하기에 간결한 문구로 정리하기 어렵다. 진실은 디테일(detail)에 있다. 그들의 선전과 내 삶을 비교 대조하는 지적ㆍ영적 수고로움을 감당해야만 속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식별이고, 교육자가 젊은이에게 비추어야 할 진리의 빛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7월 29일, 이광호 베네딕토(사랑과 책임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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