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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24: 궁녀 강경복 수산나, 문영인 비비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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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1-05 ㅣ No.1078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24) 궁녀 강경복 수산나 · 문영인 비비아나

폐궁에도 신앙숨결은 전해지고 순교의 피는 꽃으로 변해 흩날려


- 1801년 3월 포졸들에게 잡혀 끌려가는 궁녀 강경복 수산나. 폐궁인 양제궁의 나인으로 산 강경복은 같은 폐궁 나인 서경의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를 숨겨준 사실이 들통 나 순교의 화관을 쓴다. 그림=탁희성.


숨 막힐 듯 엄격한 궁궐 안. 무덤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눈 감고 못 본 척, 귀 막고 못 들은 척, 입 다물고 모르는 척 살아야 했던 사람들. 궁녀였다.

역사의 뒤안길 그늘에 조용히 존재한 궁녀들은 그러나 왕과 왕비를 보필하면서 최상층 문화인 궁중 음식과 복식, 한글과 궁중 문학 등을 전승하고 보존해 왔다. 그 역할이 이처럼 컸음에도 권력자들의 치부와 연결돼 있기에 궁녀에 관한 기록은 지금까지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실재했지만' '가려져있던' 궁녀들 가운데 '하느님의 종'이 있다. 바로 강경복(수산나, 1762~1801)ㆍ문영인(비비아나, 1776~1801)이다. 권력자에 가려진 인생을 살아야 했던 궁녀들 가운데 신앙을 받아들이고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 이들이 교회사의 한 쪽을 장식한 것이다. 신앙의 향기 '진한' 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본다.


은언군 이인의 부인 송 마리아 권유로 입교

같은 궁녀라 하더라도 강경복은 '폐궁(廢宮)'의 궁녀였다. 이 궁은 당시 한양 전동, 지금으로 보면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양제궁으로, 정조의 서제(庶弟,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1775~1801)의 어머니 숙빈 임씨가 거처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인의 장남인 완풍군(훗날 상계군) 이담이 1786년 역적으로 몰려 죽고 이인이 강화도로 유배된 이후 역적의 궁이라 해서 '폐궁'으로 불리게 됐는데, 이 궁엔 이인의 부인 송 마리아와 이담의 부인인 신 마리아 고부가 함께 살았다. 은언군을 비롯해 이들은 정조가 죽자마자 천주교도로 몰려 죽는데,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원이 회복된다.

1786년 양인 집안 출신으로 궁녀가 돼 양제궁에 살던 강경복은 1798년 송 마리아에게 천주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신앙을 권유받는다. 이때부터 그는 다른 궁녀들과 함께 교리를 배우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특히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 강완숙(골룸바, 1861~1801)과 함께 주문모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나 신앙집회에 참석하곤 했다. 그러다가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난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신앙과 교리를 실천하며 살았다.

1801년 2월 신유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 주 신부는 노비 남구월의 안내를 받아 양제궁으로 피신한다. 이때 강경복은 어머니 집에 다녀오다가 우연히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찾으러 다닌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양제궁으로 돌아와 이 소식을 전한다. 이에 주 신부는 양제궁을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데 성공했지만, 강경복은 양제궁을 몰래 떠나와 피신하던 중 그해 3월 16일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만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강경복은 즉시 문초와 함께 형벌을 받는다. 그는 갖는 형벌에 굴하지 않고 "이미 천주교에 깊이 빠져 있으므로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고 고백한다.

포도청에선 상급 재판부인 의금부로 이송, 그에게 더욱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내리게 한다. 이때 그는 정신이 혼미해져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진술한다.

의금부에선 이 진술을 듣고 그를 형조로 내려보냈으나 강경복은 형조에서 크게 뉘우치면서 다시 신앙을 굳게 증거한다. 박해자들이 주 신부를 밀고하고 마음을 돌이켜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제 신앙을 위해 형벌과 죽음을 달게 받을 각오가 돼 있었다. 이윽고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저는 천주교를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양제궁에 살면서도 주문모 신부님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이 갈수록 굳어져 왔으니 형벌을 당해 죽는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신앙을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이기경 「벽위편」 권2, 「사학징의」 권1)
 
마침내 그는 강완숙 등 동료 8명과 함께 사형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그의 나이 40살이었다.

- 7살 어린 나이로 입궁, 15년 세월을 궁녀로 산 문영인은 병으로 궁에서 나오면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입교한다. 영세 뒤 '죄의 그림자까지 피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 산 그는 순교 당시 다리에서 흘린 피가 꽃으로 변해 공중에 떠올랐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림=탁희성.


1783년 7살 때 궁녀로 뽑혀 궁궐에서 성장

한양에 살던 중인 집안 다섯 딸 가운데 셋째였던 문영인은 1783년 7살의 나이에 궁녀로 뽑혀 궁궐에서 성장한 경우다. 작은 벼슬을 하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은 두 언니를 숨겨두고 어린 문영인과 두 동생만 집에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관리들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보고 문영인을 궁녀로 선발한다.

궁에 들어간 문영인은 궁궐에서 성장한다. 15살에 머리를 올렸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글씨를 잘 쓰게 되자 궁궐에선 그에게 문서 쓰는 일을 맡겼다.

한편 그의 사가에선 어머니와 두 언니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으며 교리를 실천했다. 그의 어머니는 궁에 있는 자신의 딸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걸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이따금 집에 들를 때면 어머니와 언니들은 문영인에게 신앙생활을 할 것을 권면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어머니와 언니들이나 천주교 교리를 잘 실천하세요. 전 궁에 매여 있는 몸이라 늙어서나 실천하겠어요. 나중에 궁에서 나올 방법이 있겠지요"하고 대꾸하곤 했다.

그러던 그가 갑작스럽게 궁을 나오는 일이 벌어진다. 어느 날 저녁 한데 모여 다과를 먹으며 궁녀들과 함께 수다를 떨던 문영인은 갑자기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듯 충격을 받고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진다. 1797년 21살 때였다.

병이 악화되자 그는 결국 궁궐을 나온다. 그 때 가족들에게서 입교권면을 받고 대세를 받은 뒤 병이 나았다. 이로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교리를 배운 뒤 입교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궁에서 날마다 혹은 하루건너 그에게 의사와 약을 보내고 궁녀들 여럿이 그의 집에 머물며 간호할 때면 한 쪽 팔과 다리가 경직돼 마치 죽은 사람처럼 실신하곤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이 떠나가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씻은 듯 병이 나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곤 했다. 기적이라면 기적이라 할 일을 받아들이며 그는 신앙을 더욱 굳게 다졌다.

병이 나은 이후로 강완숙을 만난 그는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교회서적을 공부하거나 미사전례에 참석했다. 오직 기도서를 읽고 기도하는 데만 전념하면서 죄의 그림자까지도 피했다. 성인들 전기를 주로 읽으며 그들 모범을 본받으려 애를 썼다. 동시에 순교의 원의를 자주 드러냈다. 특히 성인들이 형리들에게 얼마나 너그러웠던가에 대해 종종 말하며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 순교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궁에선 3년간 모든 치료방법을 다했지만 치료하지 못하자 그를 궁적(宮籍)에서 지우고 매달 지급하던 급료를 끊었다. 이날부터 그는 그토록 자신을 보호해준 하느님 은총에 감사를 드리고 더욱더 수계생활을 철저히 실천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덕행을 쌓는 데만 치중했다. 그러던 그는 김승정 회장의 어머니인 김섬아(수산나)와 함께 주 신부 시중에 들어가 몇 해 동안 헌신적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자신의 집 어머니 곁으로 돌아와 순교할 때만 기다렸다. 마침내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정신이 혼미해져 일시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곧바로 신앙을 되찾고 다시 신앙을 굳게 증거한다. 이로써 그해 7월 2일 강경복 등과 함께 끌려 나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26살 동정녀였다.

가족들을 통해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그가 형벌을 받을 당시 다리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꽃으로 변해 공중에 떠올랐다고 한다. 또 형장에서 망나니가 그의 머리를 내리치자 땅에 떨어진 목에서 젖과 같이 흰 피가 흘러내렸다고 전해진다.
 
[평화신문, 2013년 1월 6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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