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천상병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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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5-31 ㅣ No.73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1) 천상병 시몬 (상)


하루 용돈 2000원에 미소 가득, 천생 시인 천상병

 

 

천상병 시인은 순수하고, 가난하지만 작은 것에도 기뻐했다. 주머니에 토큰 몇 개, 막걸리 한 잔 값만 있어도 하루가 행복했다.

 

 

살아 있는 시인의 유고집

 

겨울이었다. 시인 천상병(시몬, 千祥炳, 1930~1993)이 갑자기 사라졌다. 친한 벗들에게 늘 웃음을 선사해 주던 사람이었다. 친구들은 천상병을 찾아 나섰다. 그가 갈 곳이라고는 서울의 명동이나 종로 그리고 부산의 광복동이나 남포동밖에 없었다. 그곳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었다. 그래도 천상병은 나타나지 않았다. “죽지나 않았을까?”, “아냐, 죽을 리가 없어. 천상병이 어떤 사람인데? 불사신이야!”, “돈도 없고 배도 고프고 병이 나서 한없이 떠돌다 쓰러졌는지도 모르지”, “참 안됐어. 시집 한 권 못 내고 세상을 뜨다니”, “언젠가 막걸리값으로 1000원을 달라는 걸 못 준 적이 있는데 후회가 되는군.” 친구들은 사라진 천상병을 안타까워하며 이런 말들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해서 친구들은 돈을 모아 천상병의 유고 시집 「새」를 만들었다. 시집은 큰 판형에 자주색 하드커버로 호화롭게 만들었다. 시집이 나오자 화제가 되었다. 행방불명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시인의 시집을 가난한 시인들이 돈을 모아 출판했다고 언론에서는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천상병은 하루아침에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달려가 보니 그는 병원 침대에 앉은 채 그 특유의 ‘까치 웃음’을 짓고 있었다. 병명은 ‘신경황폐증’이었다. 천상병은 병원에서 여덟 달을 지냈다. 이렇게 해서 시집 「새」는 ‘살아있는 시인의 유고 시집’으로 문학사에 기록되었다.

 

 

시와 인간이 일치하는 시인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은 서울 인사동에서 전통찻집 ‘귀천’을 오랫동안 운영했다. ‘귀천’은 천상병이 목순옥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고, 배가 고팠던 그들 부부에게 밥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고마운 곳이었다. 그곳은 문인과 예술인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시인 신경림, 영화감독 이장호, 중광 스님 등 많은 문화예술인과 천상병을 사랑한 사람들이 즐겨 찾았다. 목순옥은 천상병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매일 ‘귀천’을 지켰다. 그러한 ‘귀천’이 문을 닫았다. 목순옥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 ‘귀천’은 없어졌지만 다른 ‘귀천’이 생겼다. 목순옥 조카가 인사동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소설가 김훈이 한국일보 기자로 있을 때, ‘귀천’을 자주 갔다. 그곳에서 천상병을 만났다. 김훈은 천상병의 어법, 걸음걸이, 웃음, 음색, 밥 먹는 모습, 조는 모습, 음악, 신발, 옷, 얼굴, 눈곱, 입가의 침버캐, 주머니 속의 1000원짜리 두 장, 선글라스 등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의 시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김훈은 천상병을 ‘시와 인간이 일치하는 시인’이라 했다.

 

- 왼쪽부터 이외수, 천상병, 중광 스님.

 

 

가장 빼어난 서정 시인

 

또한 어떤 소설가는 천상병을 ‘하드웨어는 그렇게 생겼어도 소프트웨어는 깨끗한 눈(雪)과 같다’고 했다. 천상병의 친구 민영은 천상병을 ‘가장 빼어난 서정 시인이며 가장 순수한 방외인(方外人)’이라 했다. 민영이 천상병을 처음 만난 것은 부산 피란 시절이었다. 대청동에 있는 르네상스 다방에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첫눈에도 천상병은 다른 문인들과는 다르게 보였다. 민영은 그때의 첫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뭣보다도 옷차림과 용모가 그러했다. 피난 때라 하더라도 모두 말쑥한 양복 차림이었는데, 천상병만은 미군 군복에 물을 들인 검정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언제 세탁했는지도 모를 만큼 때가 끼고 구깃구깃한 군용 상의, 그 위에 얹힌 조물주가 빚다 만 진흙덩이같이 생긴 얼굴. 목소리는 무쇠를 삼킨 것처럼 크고, 이따금 남의 이목을 가리지 않고 웃어젖히는 까치 웃음… 그 꼴은 옛 그림에 나오는 한산(寒山)·습득(拾得) 못지않았다.”

 

친구들은 천상병의 재기 넘치는 말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친구들은 배꼽을 쥐고 웃었다. 천상병은 선후배를 막론하고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어 세금(술값)을 요구했다. 그러면 거절하지 않고 주었다. 요구하는 술값이 막걸리 한 잔 값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난해도 행복

 

천상병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천석꾼이었던 그의 부친이 일본인의 사기에 휘말려 재산을 전부 잃고 일본에 건너가 살았기 때문이었다. 천상병은 중학교 2학년 때에 해방을 맞았다. 귀국해 경남 마산에 정착했다. 마산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뒷산에 올라갔다가 사람들이 무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고 ‘사람은 모두 죽게 마련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시로 썼다. ‘강물’이라는 시였다.

 

당시 그 학교 국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시인 김춘수가 천상병의 담임이었다. 김춘수는 천상병의 시를 보고 감성의 뿌리가 살아있다고 칭찬해주었다. 그 시는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문예’ 지에 실렸다. 중학교 5학년(현재 고2) 학생이 당당히 시인으로 등단한 것이다. 천상병은 중학교 6학년(현재 고3)이 되자 대학 진학을 놓고 고민했다. 문과가 적성이었으나 이미 시인이 되었기에 굳이 대학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선배의 말을 듣고는 대학에 있는 학과들의 이름을 종이쪽지에 적어 돌과 함께 힘껏 던졌다. 가장 멀리 날아간 돌에 적힌 내용대로 대학에 가기로 한 것이다. 가장 멀리 날아간 돌의 쪽지를 펼쳐보니 ‘서울대 상대’가 나왔다. 그래서 서울대 상대에 지원해 합격했다. 입학 후, 학과 공부보다는 문인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했다. 천상병의 본거지는 부산의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와 ‘돌체’였다. 그는 무척 감성적이어서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의 눈물을 보려면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신청하면 되었다.

 

- 서울 인사동 '귀천'에서 필자 촬영

 

 

아궁이 속 조의금

 

천상병은 가난해도 행복하게 살았다. 한잔의 커피와 한 갑의 담배, 한 사발의 막걸리, 그리고 버스값만 있으면 하루가 행복했다. 그는 가난을 직업처럼 살았다. 시 ‘나의 가난은’에서 가난한 삶을 보란 듯이 노래했다. 가난을 노래한 또 다른 시가 있다. ‘소릉조(少陵調)’라는 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계시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다. 자신만 홀로 서울에 있다. 부모님 산소에 가고 싶고 부산에 있는 형제들도 보고 싶은데 그곳에 갈 여비가 없다. 죽어서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자신은 영영 죽을 수 없다는 내용의 시다. 눈물 속에서도 웃음이 피어나는 슬프디슬픈 시다.

 

천상병은 아내에게 매일 2000원씩 용돈을 타서 썼다. 이 돈으로 가게에서 맥주 한 병,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고 버스 토큰 서너 개와 담배를 샀다. 그러고도 어떤 때는 돈이 남아 저축도 해 통장에 100만 원 가까이 들어 있기도 했다. 천상병은 그 돈으로 같이 사는 장모의 장례비 30만 원을 떼어낼 생각이고, 자신을 따라다니는 문학청년의 결혼 비용으로 50만 원을 쓸 계획이며, 나머지는 처 조카딸 결혼 비용으로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장모의 장례비를 걱정하던 천상병은 장모의 장례비를 미리 준비해 놓고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천상병의 장례식이 끝나자 장모는 들어온 조의금을 잘 보관한다며 천상병이 자던 방의 빈 아궁이에 돈뭉치를 신문지에 싸서 넣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천상병의 아내는 날씨가 쌀쌀하고 비도 내려 남편이 추울 것으로 생각해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조의금으로 들어온 수백만 원이 새카맣게 타버렸다. 다행히 그 재를 은행에 가져가니 얼마간 주었다. 결국 그 돈은 장모 장례비가 되었다.

 

 

동백림 사건에 연류, 고문을 당하다

 

시인 신경림에 따르면 천상병은 몸이 워낙 튼튼해서 아무리 술을 마셔도 탈이 없었다고 했다. 또한 어디서나 밥을 먹어도 남기지 않고 바닥까지 다 긁어먹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건강한 모습은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이후에는 볼 수가 없었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란 서베를린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에 구경 간 사건을 말한다.

 

당시 독일은 동과 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동쪽은 사회주의 국가이고, 서쪽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다. 서슬이 시퍼렇던 국내 반공법(현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연루자 전원을 체포해 한국으로 송환했다. 재판부는 이들 유학생에게 사형, 무기징역 등의 중형을 내렸다.

 

그런데 아무 연고도 없는 천상병이 엉뚱하게 연루되었다. 천상병은 억울하게도 중앙정보부에서 3개월, 교도소에서 3개월 고생하다가 풀려났다.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지독한 전기고문을 세 번씩이나 받았다. 전기고문을 받을 적마다 까무러쳤다. 그 후유증으로 치아가 거의 빠졌고, 말을 더듬는 습관이 생겼다. 나중에는 정신병원에 갔고, 아이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천상병은 ‘그날은’이란 시를 써서 자신이 겪은 무시무시한 고통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이론(다리미) 밑 와이셔츠같이’ 고문당한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5월 28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2) 천상병 시몬 (하)


‘귀천’ 노래한 시인, 하늘나라 주님 앞에 ‘감사하다’ 외치리라

 

 

천상병 시인과 아내 목순옥. 시인의 아내는 몸도 마음도 약한 남편을 평생 보살피며 함께 했다.

 

 

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천상병은 술을 무척 좋아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술을 마셨다. 시인, 소설가, 평론가와 어울려 다니면서 마셨다. 술 중에서도 막걸리를 제일 좋아했다. 막걸리를 예찬하는 시를 지을 정도였다. 그는 막걸리만 마시고 산 적이 있었다. 막걸리가 밥이었다. 식사를 거부하고 곡기를 일절 끊고 오직 막걸리만 마셨다. 막걸리는 한 시간에 한 잔씩 시간과 양을 정해 놓고 정확히 마셨다. 그렇게 사니 간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수십 일 동안 내리 설사만 하였다. 배가 임산부의 배같이 부풀어 올랐다. 발도 퉁퉁 부어올랐다. 병명은 간경화였다.

 

종합병원에서 치료가 시작되었다. 설사약을 복용했다. 하루에 기저귀를 40장씩 갈았다. 배가 차츰 가라앉았다. 그런데 온몸에 심하게 두드러기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가려워서 북북 긁었다. 긁으면 상처가 났고, 피가 줄줄 흘렀다. 진물도 흘러내렸다. 천상병은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웠다. 마치 이집트 미라 같았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모두 마음의 준비를 했다. 천상병도 자신이 죽으면 춘천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수녀님이 신부님을 모셔 와 종부성사를 주었다. 그런데 정말 친구들 말대로 그는 불사신처럼 다시 살아났다.

 

천상병의 술에 대한 일화는 끝이 없다. 그는 대학 시절, 소설가 한무숙 집에서 식객으로 있었다. 한무숙은 문학청년을 좋아해 방 하나를 제공했다. 어느 날 밤에 잠은 안 오고 술 생각이 났다. 낮에 얼핏 본 안방 화장대 위의 양주병이 눈에 어른거렸다. 한무숙 부부가 잠든 안방에 살금살금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화장대 위를 더듬어 양주병을 잡아 들고는 얼른 나왔다. 그러곤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갑자기 향수 냄새가 나고 속이 메슥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양주병인 줄 알고 들고 나온 것은 한무숙이 아끼던 향수였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천상병이 부산시장 공보비서로 일할 때였다. 시장 부인이 중매를 서겠다고 했다. 그래서 선보는 자리를 마련해 천상병을 초대했다. 천상병은 결혼 상대자에겐 관심 없고 오직 화려한 술상에만 관심이 있었다. 매번 술만 실컷 먹고 나오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 시장 부인도 천상병의 속셈을 알아차리고는 그다음부터는 일절 중매를 서지 않았다.

 

왼쪽부터 이외수, 천상병, 중광 스님.

 

 

이외수, 중광 스님과의 인연

 

천상병은 하늘나라에서 제일 높으신 분은 하느님이고, 둘째는 예수님, 셋째는 가브리엘 대천사, 넷째는 천사들이라고 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고, 가브리엘 대천사는 우리 인간 세상에 있다고 했다. 그 가브리엘 대천사가 바로 소설가 이외수와 중광 스님이라고 했다. 이외수는 행동거지나 모습이 자신과 비슷하고, 외로운 모습도 마음에 들고, 세수를 일주일 동안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자신과 닮아 좋아했다.

 

춘천의료원에 간경화로 입원했을 때 이외수가 찾아왔다. 천상병은 그를 보자마자 “이외수야! 너는 내 동생이다”라고 했다. 그 후 이외수가 대마초 사건에 휘말린 뉴스가 나오자 천상병은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 이외수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랬더니 이외수가 풀려났다. 이외수는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돕겠다고 중광과 함께 시화집 「도적놈 셋이서」라는 책을 만들었다. 제법 많이 팔렸다. 그래서 들어온 인세로 ‘귀천’을 운영하며 지은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천상병이 중광을 만난 곳은 광주에 있는 한 도자기 가마에서였다. 그는 검정 고무신에 누더기를 입고 얼굴에 흙이 묻은 모습으로 천상병의 손을 잡고 반가워했다. 천상병은 중광을 ‘보살님’이라 불렀고 중광은 천상병을 ‘도사님’이라 불렀다. 중광은 그림을 그릴 때 혀를 이리저리 돌리며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 그렸다. 천상병은 중광의 그 천진난만한 모습을 좋아했다. 춘천의료원에 입원해 있을 때, 중광은 문병 와서 베개 밑에 20만 원을 넣고 갔다. 당시로는 매우 큰 돈이었다. 중광에게 용돈을 달라고 하면 선 듯 용돈을 주었다. 누더기를 걸치고 가슴에는 고장 난 시계를 달고, 머리에는 울긋불긋한 장식의 모자를 쓴 중광의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천상병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천상병은 아내도 가브리엘 대천사라고 했다. 여섯 살짜리 아기로 마음도 몸도 약한 불쌍한 남편을 평생을 보살펴준 ‘착한 대천사’라고 했다. 하느님이 이런 착한 대천사를 자신에게 붙여주었다고 늘 고마워했다.

 

 

하늘로 돌아간 시인

 

천상병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의 깊은 신앙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시가 바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로 시작하는 ‘귀천(歸天)’이다. 시인은 하늘에서 아름다운 이 땅으로 소풍을 와 기슭에서 종일 놀다가 어느덧 석양이 물들며 구름이 그만 놀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면 하늘로 돌아가 하느님께 아름다운 소풍이었다고 말하겠노라 했다. 천상병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지을 수 있었을까. 이 세상에 사는 것을 어떻게 하늘에서 소풍 온 것으로 비유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두렵고 무서운 죽음을 이토록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 종교적 영성이 하늘에 가 닿지 않으면 이런 시는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시에 위로받고 힘든 삶을 이겨내며 하늘나라를 꿈꾸며 살고 있다. 시인 신경림은 ‘귀천’을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했다.

 

천상병이 제일 가깝게 믿고 의지한 분은 하느님이었다. 그는 “늘 하느님은 나하고 함께 계시다”고 했다. 하느님은 자신의 손짓, 발짓, 몸짓을 일일이 지켜보시고 마음까지 읽어내서 잘못하면 벌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는 하느님을 언제 어디서나 찾았다. 하느님을 부르며 주거니 받거니 혼자서 이야기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맛있는 거를 주셔서”, “하느님, 글을 쓰게 해주시오” 등등…. 천상병은 사람들에게 늘 자신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에서 이 땅으로 잠시 소풍을 나온 것이고, 하느님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천상병은 하느님을 매일 그렇게 부르면서도 또한 시몬(深溫)이라고 세례까지도 받았는데도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주변에서 성당에 가라고 하면 “하느님은 거기 안 가도 늘 나하고 있는데 뭐 할라꼬”라고 했다. 하느님은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며 자신의 ‘막강한 빽’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꼭 천국에 가기로 되어 있다고 아이처럼 자랑했다. 그러면서도 천상병은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라고 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고통받게 했으니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늘 “하느님, 용서해 주이소”를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술로 인해 병을 얻은 것도 하느님이 벌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천상병은 그해 가을부터 겨울까지 내내 집에 있었다. 거동이 불편하고 날씨가 추워서 외출할 수 없었다. 따뜻한 봄이 오면 인사동 ‘귀천’에 가겠다고 했다. 그 봄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천상병은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밥 먹는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너무 급하게 먹었다. 또한 많이 먹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장모가 물 주전자를 주며 천천히 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주전자를 받아 들고 벌컥벌컥 마시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하느님이 그만 놀고 어서 돌아오라고 부르신 것이었다.

 

참고자료 : ▲ 천상병 「천상병 전집」 (산문). 평민사. 2018. ▲ 천상병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도서출판 강. 1990. ▲ 천상병 「천상병 시집 새」 도서출판 답게. 1992 ▲ 목순옥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 청산. 1993 ▲ 신경림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우리교육. 1998. ▲ 백형찬 「예술혼을 찾아서」 서현사. 2009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6월 4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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