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프랑스 순례: 샤스탕 신부의 고향 디뉴레뱅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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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1096

[영원을 향하여 시간을 걷다 - 프랑스 순례] 샤스탕 신부의 고향 디뉴레뱅에 가다


낮은 산 어귀에 안개인지 구름인지 드리워진 강을 끼고 가는 길이 절경이었다. 샤스탕 신부의 고향 디뉴레뱅(Digne-les-Bains)으로 가는 길이었다. 보통 사이프러스는 묘지 부근에 심는데, 우리가 가는 길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만나게 되었다. 고흐가 말년에(?)새삼 사이프러스를 발견하고 많이 그리게 된 것도 그만큼 사이프러스가 많았기 때문일까?

그리스 신화의 아폴론이 사랑했던 소년 키파리소스가 어느 날 실수로 애지중지하던 사슴을 죽이게 된 후, 극심한 슬픔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영원히 고통의 눈물이 마르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폴론은 어쩔 수 없이 사이프러스로 변하게 해주었고, 사람들은 눈물 같은 수액이 흘러나오는 이 나무를 슬픔을 기억해야 할 장소에 심었다고 한다. 프랑스 땅, 슬픔이 지천에 젖어있어서 사이프러스도 그렇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일까?

▶ 새카만 돌산을 지나 샤스탕 신부가 태어난 마르쿠(Marcoux)에 닿았다.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너른 농경지 너머로 몇 겹 둘러싸인 산들, 그리고 더 멀리 알프스의 만년설이 드리워진 곳이었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라살레트도 근처에 있고, 영화 ‘위대한 침묵’의 배경인 카르투시오 수도원도 저 만년설 어디쯤에 있다고 했다(114쪽 사진).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한 정 샤스탕 야고보 신부가 이 고즈넉한 마을에서 1803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사흘 만에 세례를 받고, 1826년 사제가 되어 첫미사를 봉헌했던 마을 성당은 나지막한 산 중턱에 있었다.

십자가의 길이 있다는 이정표를 따라 짧은 오솔길을 오르자 장미꽃송이들이 흐드러지고 있었다. 꽃들마저 제 향기를 잃은 채 팔리는 서울에 살다가, 자연 그대로 피어있는 장미꽃 향기를 만나니, 타임머신을 타고 그리운 한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기도 했다.

▶ 하얀 들꽃 피어있는 모퉁이를 돌아간 곳에 작은 성당이 있었다.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마르쿠 성당.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180년경 이 성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미 그 전에 세워진 성당이다.



돌로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에서 마르쿠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이런저런 장식이 없어 더 밝게 보이는 성당 안에 황금빛 제대가 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프랑스혁명 때 파괴된 수녀원에서 옮겨온 17세기 제대라고 했다. 그 부조화 또한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이었던 거다.

성당 한쪽 벽에 샤스탕 신부와 관련된 여러 자료가 붙어있고, 제대 한쪽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갓 쓰고 도포 입은 신부님이 그려져 있었다.

마르쿠 성당 신부님이 샤스탕 신부의 여정을 따라 순례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지난겨울 읽은 임금자 수녀님의 소설 「파격」을 따라 김대건 신부님의 여정을 순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고도 고된 길. 그리고 너무나 짧았던 사제생활. 문득 부족함 없이 불편함 없이 순례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송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잠시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떠나가기 위해 성당 밖 돌의자에 앉아계신 할머니와 눈을 마주치며 “Au revoir(또 봐요, 안녕).”라고 인사할 때 할머니의 마른 손에서 따뜻한 힘이 느껴졌다. 이미 절반은 하늘에 닿아 있는 것 같은 손이었다.

언제 다시 만나뵐 수 있을까? 언젠가 하느님의 품에서 다시 만날 때, 우리 이승에서의 짧은 만남을 기억하고 계실까?

성당을 돌아 나올 때, 작은 공동묘지에 내리쬐는 한낮의 햇살이 따가웠다.

▶ 또다시 넓게 펼쳐진 농경지 사이로 난 길을 걸어 샤스탕 신부의 생가 터로 향했다. 연분홍 찔레꽃이 피어있는 마을로 접어들어 찾아간 생가에는 샤스탕 신부의 후손인 마르탱 씨가 살고 있었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 잠시 집안을 돌아보았다. 사진이 없어 형님 얼굴을 참고해서 그렸다는 샤스탕 신부의 초상이 놓인 작은 거실. 조상의 믿음과 행적을 자랑스러워하는 후손들이 참 보기에 좋았다.

샤스탕 신부가 고향을 떠날 때 건넜던 개울로 가보았다. 개울이라기엔 꽤 폭이 넓은 시내였는데, 그의 조선행을 말리며 따라온 어머니가 개울에 빠지자, 어머니를 안전하게 모셔다놓고 마음먹은 길을 갔다고 한다.

그날, 그 이별이 영원한 것이라는 걸 그도 어머니도 이미 알고 있었다. 지상에서 마지막 인사가 된 편지에서 성인은 부모님께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이 세상 재물로는 가난하나, 십자가로는 비옥한 이 복받은 포교지에 저를 불러주신 주님의 섭리에 천만 번 감사를 드린다.”고 썼다. 후회 없이 사랑하고 헌신한 서른일곱 푸른 청춘이었다.



▶ 샤스탕 신부가 비장한 마음으로 건넜던 블레온 강(La Bleone). 그 시내가 마음에 자꾸 흘렀다. 우리 삶에도 늘 존재하는 그 강. 되돌아가거나, 뒤로하고 떠나야만 하는 강. 난 때때로 맞닥뜨리는 그 강 앞에서 얼마나 자주 샤스탕 신부와 같았을까?

* 이선미 로사 - 서울대교구 혜화동본당 신자.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 성지를 순례하다 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3년 3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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