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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정하상 성인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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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5 ㅣ No.1455

[특별 연재] 이 시대, 순교신심에서 길을 찾다


정하상 성인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삶의 푯대를 상실한 현대인들은 인문학, 심리학, 과학의 문을 서성이며 길을 찾고 있다. 여기, 한평생 순교신심을 연구해온 손골성지 윤민구 신부는 신앙의 유산이 담긴 순교신심에서 삶의 방향키를 찾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올해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이 이뤄진 기쁨의 해이다. 정하상 성인과 선교사들의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규범이 되고 기준이 된다.


지난 호에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 성인은 1817년 1월 우리나라에 입국하려던 중국인 선교사 두 분을 만나기 위해 변문(邊門)에 갔지만 만나지 못한 적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정하상 성인의 성직자 영입 노력은 잠시 주춤하였다. 그 이유는 먼저 조선교회에 선교사를 파견하려는 의지를 지녔던 사라이바(Saraiva, ?-1818) 북경교구 주교가 1818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하상 성인은 주교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다. 《기해일기》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주교의 명이 “노모(老母)와 수정(守貞)하는 누이를 외교 지방에 둠이 불가하다” 하시는 고로, 돌아와 즉시 가만히 들어가 모친과 누이를 경성으로 데려왔다가 곧 시골 산중(山中)으로 옮아 가 한가지로 6 · 7년을 지내다가...

그러니까 주교가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니 어머니와 동생을 돌보며 지내면서 다음 기회를 찾아보자’고 명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정하상 성인은 어머니 유조이(柳召史, 체칠리아, 1761-1839) 성녀와 동생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 1797-1839) 성녀와 함께 시골에서 6~7년 동안 생활하게 되었다. 정하상 성인이 1814년 신자들의 추대로 교회지도자가 되어 그 동안 지내던 마재의 정약용(丁若鏞, 요한, 1762-1836)의 집을 떠난 후에도 어머니와 동생은 7년을 더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는 기록을 보면 정하상 성인의 시골 생활은 1820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6 · 7년이 지난 1825년이나 1826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던 것 같다.

이 시기에 정하상 성인은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1791-1839) 성인을 사도직의 동반자로 얻을 수 있었다. 1823년 유진길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성직자 영입 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조선신자들은 1811년에 이어 또 다시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직접 쓴 사람은 유진길 성인이었는데 1824년 사신의 역관 자격으로 북경에 가서 정하상 성인과 함께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리고 북경의 선교사들을 통해 또다시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이 편지에서 조선신자들은 국내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육로(陸路)를 통해 국경을 넘는 것이 어려워졌으니 해로(海路)를 이용해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선교사가 성사를 집전할 뿐 아니라 자신들과 후손들이 영구히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편지를 받은 교황청에서는 예수회에 조선선교 가능성에 대해 물었으나 답은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지를 위임하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도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다. 선교사 부족, 조선 입국로(入國路)의 불확실, 회원들의 동의 여부 불투명, 재정난 등이 그 이유였다. 그런 가운데 1929년 11월 17일 브뤼기에르(B. Bruguiere, 蘇, 1792-1835) 주교가 조선선교를 자원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에 이어 샤스탕(J.H. 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신부도 자원하였다.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마침내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대리감목구를 세우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였다. 그런데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자신이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832년 7월 25일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즉시 조선을 향해 떠났다. 샤스탕 신부에 이어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1803-1839) 신부도 합세하였다.

조선대리감목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오게 된다는 소식을 조선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보다도 먼저 안 것 같다. 1832년 초 북경교구에서는 이 소식을 조선신자들에게 전하였다. 하지만 조선신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도 ‘서양인을 맞아들이기가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선신자들은 오랜 세월 서양 선교사 영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두 번이나 교황에게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막상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양인을 맞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짧은 말 속에는 서양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당당하게 들어오지 않고 숨어서 들어온다면 영입하기가 어렵다는 조선신자들의 의지가 표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선신자들이 서양 선교사를 영입하려는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 하였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북경을 찾아오는 조선신자에게 1832년 11월 23일 편지를 보냈다. 이때 북경을 찾은 사람은 정하상 성인이었다. 이 편지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서양인을 맞아들이는 것이 어렵다고 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다음해 자신을 맞이하러 오라고 하였다.

조선 신자들이 초기교회 때부터 계속 서양 선교사를 요청하였던 것은 성사를 받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떳떳하게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궁극적으로 박해를 받지 않고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조선신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신앙의 자유를 얻어주려는 어떤 대책이나 방안도 없이 무턱대고 조선대리감목구가 만들어지고 서양인 주교가 몰래 조선으로 잠입하겠다고 하니 조선신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794년 말 우리나라에 입국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1801) 신부는 조선 사람들과 외모가 같았어도 결국은 발각되어 도망다니느라 고생만 하다가 순교하였다. 그로 인해 신자들은 신자들대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였다. 그런데 이제 얼굴과 외모가 전혀 다른 서양 선교사가 숨어서 몰래 들어온다면, 신앙의 자유를 얻기는커녕 주문모 신부의 경우보다도 더 숨기기가 어렵고 그때보다도 더 큰 박해와 희생을 자초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던 것이다.

1832년 말 북경에 갔던 정하상 성인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 돌아왔다. 그런데 브뤼기에르 주교의 편지를 읽은 조선신자들은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하상 성인을 비롯한 조선신자들은 결코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신유박해의 참상을 직접 몸으로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천주교 신앙을 끝까지 지키기 원하면서도 무모한 행동으로 수많은 죄 없는 신자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1833년 12월 6일(음력 10월 25일) 조선신자들을 대표하여 유진길 성인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신과 함께 선물을 가득 실은 큰 배를 타고 인천 앞 바다에 와서 조선의 임금의 허락을 받고 공공연하게 입국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만일 첫 번째 시도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교황이 새로운 선물을 실은 사절을 보내어 성공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썼다. 하지만 조선신자들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신자 대표들을 파문하겠다고 하였다. 결국 조선신자들은 뜻을 굽히고 서양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런 가운데 중국인 여항덕(余恒德, 빠치피코, 1795-1854) 신부가 1834년 1월 3일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한편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채 병사하였다. 그리고 조선신자들은 약속대로 1836년에 모방 신부를 조선에 영입하였고 1837년 초에는 샤스땅 신부도 조선으로 영입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여항덕 신부를 중국으로 돌려보냈다.서양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였던 정하상 성인은 1837년 말 입국한 앵베르(L.M.J. Imbert, 范世亨, 1796-1839) 주교를 수행하며 활동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정하상 성인을 사제로 키우려고 했지만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정하상 성인은 박해 소식을 듣고 급히 앵베르 주교를 피신시킨 후 주교대신 체포되었다. 그리고 1839년 음력 8월 15일(양력 9월 22일)에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 1975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하여 1983년 라떼란대학교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3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으로 일하였고 안성 대천동, 성남 수진동, 이천, 분당 야탑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후 현재 손골성지 전담신부를 맡고 있다.

[외침, 2014년 4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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