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강론자료

2016-03-20.....주님의 수난성지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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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6-03-19 ㅣ No.2013

 

사순 제6주일 ( 주님의 수난성지주일 )

이사야 50,4-7         필리피 2,6-11         루카 22,14-23,56

1. 오늘 전례에 대한 해설자의 해설 + 사제입장(호산나다윗~~)

2. 예절서6-오늘전례 설명+나무축성-성수(가운데로만(헤브레아)) / 성당 뒤에 도착, 시작성가를 하면 ? 제대로 향하고,

3. 다녀와서.....예루살렘입성기념 복음 + 짧은 설명

4. 제단에서 본기도부터 미사 시작

5. 다른 미사와 교중미사는 ?수난기의 길이에만 차이 있음

2016. 3. 20. 이태원

 

주제 :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환호하기

오늘은 성주간의 첫째 날, 우리 주님의 수난성지주일입니다. 오늘을 설명하는 전례용어, 주님의 수난성지주일에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두 가지 낱말을 묶어 기억하는 날입니다. 순서대로 설명하면, 첫 번째는 <수난(受難)>이고, 두 번째는 <성지(聖枝)>입니다.

 

두 가지 표현이 함께 있다고 했고, 그 말을 구별했지만, 지금 말씀드린 두 가지의 일은 같은 날이나 같은 시간이나 또는 연속으로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수난이라는 말의 정확한 시간은 성주간 목요일, 예수님께서 최후만찬과 성체성사를 세우신 다음의 시간부터 금요일의 오후 3시에 있었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시기까지를 가리키는 표현이고, 다음에 등장한 성지라는 말은 주간의 첫째 날, 예루살렘에 살던 히브리백성의 일부 사람들이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나뭇가지를 흔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맞이하고 환영한 데에서 온 표현입니다.

 

성지주일에 있었던 일은 구원자를 예루살렘성으로 모셔 들이는 기쁨을 만끽하고 그 기쁨을 노래하는 날입니다만, 그 일을 예수님의 수난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운 날입니다. 예루살렘입성의 바탕에는 기쁨이 있다는 얘기는 성지를 축성하고 읽은, 입성기념식복음에 나온 내용입니다.

 

그 다음으로 길게 읽은 수난기는, 목요일의 밤, 최후만찬시간을 끝낸 다음부터 금요일의 한낮까지 있었던 내용이라고 시간을 구별하면, 수난기로 읽은 내용에 나오는 일은 오늘 이 자리에서 강조할 일은 아니고, 이번 주간 목요일전례와 금요일전례에서 되새기고 묵상할 일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나라가 차지했던 그 옛날의 땅은 우리나라보다 그 크기가 작습니다. 나라의 힘이 땅의 면적에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민족이 살았던 그곳은 로마제국에서도 다스리기가 매우 힘들었던 지역이라고 합니다. 히브리민족은 개성이 강한 민족이고, 그들의 협조를 얻으려면 권력과 권한을 주고받는 일이 앞서야 간신히 회유할 수 있는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점령된 지역에 살았으면서도 군대에 징집되지도 않았고, 사형제도를 뺀 많은 일들에 대해서는 로마제국의 황제에게서 자치권을 허락받은 아주 독특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매우 똑똑하고 현명했던 민족은 이렇게 획득한 그 좋은 기회와 힘을 민족과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이지만, 이런 소리를 새삼스레 하는 것은 똑같은 일이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반복될 수 있는 안타까움을 피하자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삶에서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로는 체면이나 자존심에 따라 움직인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기준들은 절대적 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해석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내 앞에 벌어지는 일에 대한 판단은 수시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질이 드러난다면, 사람이 말로는 올바른 길을 따라 산다고 하겠지만, 정말로 그렇게 사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실 때,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처럼,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일을 환영할까요?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기에 항상 정답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군가가 옳은 길이라고 말해줘도 내가 그 말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니, 사람이 가진 자유는 큰 편입니다. 우리에게 있다는 자유를 사용하여, 하느님의 일이 세상에 드러나는 일을 반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크고 웅장한 말이나 마차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산비탈을 걸어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입었던 겉옷을 길가에 펼쳐놓았고, ‘우리를 구원해주소서라는 뜻의 호산나를 외쳤다고 루카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면서, 이 성당에 들어오면서, 또 내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면서 어떤 자세로 그분을 받아들이는지 내 행동과 입성기념식복음에서 들은 내용과 비교해야 할 일입니다.

 

신앙인으로서 행동하는 삶의 결과가 내게는 어떤 모양으로 돌아오는지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고백하면서 거창하게 시작했던 신앙을 소홀하게 여기는 안타까운 일을 무심코 시작하고 그 일이 반복돼도 충격도 없이 세상의 일에만 열심히 삽니다.

 

오늘은 성지주일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삶에서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환영하면서 히브리백성들이 모셨던 날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똑같이 살지 않기에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신앙인으로서 바른 길을 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하게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신 예수님, 저희에게도 구원의 기쁨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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