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혼인, 성과 사랑, 그리고 하느님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1 ㅣ No.1175

[복음살이] 혼인, 성과 사랑, 그리고 하느님



우리나라는 9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높은 이혼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구 천 명당 이혼 건수를 가리키는 조이혼율(粗離婚律: Crude Divorce Rate)은 1993년 1.3건에서 1998년 2.5건, 2003년 3.5로 최고점을 기록한 후 2004년 2.9건, 2005년과 2006년은 2.6건,  2008년 2.4건, 2010년과 2011년은 2.3건으로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전체 이혼 중에서 혼인한 지 4년 이하 동거 부부의 이혼 비율이 가장 높은데 2001년 전체 이혼의 28.2%, 2006년 26.5%, 2011년 26.9%로 큰 변동은 없는 편입니다. 그리고 전체 이혼 중 외국인 배우자와의 이혼구성비는 2001년 1.3%에서 2006년 4.9%, 2008년 9.4%, 2011년 10.1%로 크게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크게 눈에 띄는 사회현상은 20년 이상 동거 부부의 이혼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1993년 전체 이혼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5.3%에서 2005년 18%, 2006년 19.2%, 2008년 23.1%, 2010년 23.7%, 2011년 24.8%로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4년 이하 동거 부부의 이혼 비율을 바짝 따라가고 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발표(2006년)에 따르면 중년 부부의 이혼 사유로는 경제문제가 30%로 가장 많고, 이어 성격차이(24.2%), 외도(20%)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언론에서는 여성들의 독립적인 경제능력이 향상되고 동등한 재산분할 등이 일반화되면서 참지 않으려는 경향이 더 강해진 것이 중년이혼 증가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인 쪽에서 먼저 이혼을 제의하는 경우가(72%) 남편(24.4%) 보다 3배 가까이 많은 데서도 드러납니다. 평생을 사랑하겠다고 서약했던 부부가 20년을 함께 살면서 사랑은 시들고 억지로 참고 살다가 뒤늦게 서로를 비난하며 ‘자유롭게’ 살겠다고 헤어지는 모습은 혼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의 혼인과 사랑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혼인서약 충실히 지키려고 얼마나 노력했나?

종교별 혼인율이 정확히 조사된 바는 없지만 가톨릭 신자들도 이혼 문제에서 예외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심각한 폭력, 외도, 도박, 정신 질환 등과 같은 사유들 중에는 혼인 생활이 불가능하기에 교회법상 혼인무효의 판정의 근거로 인정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도 무조건 참고 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처음 배우자를 선택하고 혼인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혼인에 의미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혼인 서약을 충실히 지키려고 얼마나 성실하게 노력했는지 묻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흔히 이혼 사유로 거론되는 경제문제, 성격차이가 혼인 예식 때 하느님과 친지들 앞에서 행했던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라는 서약을 뒤집어 버릴 정도의 무게를 담고 있을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그 서약은 단지 형식이었을 뿐일까요?

가톨릭교회는 혼인이란 “부부가 서로 상대방에게 자기 자신을 주고받는 인간 행위”로서 “자신을 다른 한 사람에게만 온전히 내어주겠다는, 서로가 취소할 수 없게 공개로 동의하는 확고한 약속”을 포함하는 부부 사랑의 본질 위에 세워진 제도라고 가르칩니다(사목헌장 48항). 또한 교회는 혼인이 하느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실 때부터 의도하신 제도이므로 세상의 어떠한 권력도 혼인에 대한 천부의 권리를 폐지하거나 혼인의 특성과 목적을 바꿀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혼인은 ‘성사’입니다. 혼인이 성사라는 의미는 부부가 하느님 앞에서 서로에게 바치는 혼인 서약을 통해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을 보여주는 사랑의 소명을 받은 것이며, 또 그렇게 살 수 있는 은총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혼인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바친 사랑처럼 서로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으로 그 신적인 사랑과 충실함을 증거 하는 표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혼인 결합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평생 취소할 수 없는 약속이며, 그 사랑의 결실로 태어나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키워야 할 사명도 함께 부여받는 것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219-220 참조).

이런 가톨릭교회의 혼인관은 오늘날 자기중심적인 삶을 우선시하고 쉽게 이혼하는 세태에서 별로 설득력이 없이 들릴지 모릅니다. 물론 배우자가 외도나 폭력 등으로 혼인의 약속을 먼저 저버린 경우 계속해서 함께 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평생 배우자에게 ‘억눌려’ 지내온 중년의 부부가 남은 인생을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욕구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닙니다. 부부의 다양한 사정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혼인 서약은 평생을 건 약속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부의 사랑은 인내, 용서, 그리고 화해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심각한 우리나라의 혼인과 가정 붕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톨릭 신자부터 이러한 교회가 가르치는 성과 혼인, 사랑의 의미, 그리고 부부의 삶에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을 더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혼전 성관계 하느님 뜻에 맞지않아

부부의 혼인 서약 안에서 두 사람의 사랑의 결합으로 태어날 생명을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키우겠다는 약속이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거의 되어있지 않은 대부분의 혼인하지 않은 이들의 성적 결합은 적절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도 맞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남녀의 성적 결합에는 본질적으로 사랑과 생명이 분리됨 없이 담겨있습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제외되어 있다면 성은 왜곡되고 축복이 아니라 고통과 죄의 원천이 됩니다. 심지어 사랑조차도 제외된 채 쾌락을 위해서만 남용되는 성에서는 더더욱 생명의 가치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여러 기관이 조사한 바로는 젊은이들 3명 중 2명은 혼전 성관계를 해도 무방하다고 응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면 결혼과 상관없이 성관계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피임을 잘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혼전 성관계를 옹호하며 결혼에 대한 얄팍한 현대의 세속적인 가치관에 동조하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무지하고 무책임한 성관계의 결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중심적인 소유욕, 성적 욕구나 감정, 외로움을 잊거나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을 찾는 심리에서 나오는 성행위를 진정한 사랑과 혼동합니다.

상업주의와 선정주의로 말초적 즐거움을 자극하며 시청률 상승만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일부 미디어는 이런 식의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너무도 자연스러운 젊은이들의 통과의례인 것처럼 묘사합니다. 상업 미디어는 대부분 동거나 혼전 성관계는 과거의 고리타분한 윤리관이 이해 못하는 세련된 행위이며, 마치 더 행복한 남녀관계를 이루기 위한 필수과정인 것처럼 비추면서도, 그로 인한 임신과 낙태 등 후유증의 문제는 거의 무시합니다.

사실 100% 완벽한 피임법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공피임이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인공피임은 실패할 경우 대부분 낙태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의 참된 의미 배워야

따라서 청소년기에 올바른 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며, 특히 교회는 보다 적극적으로 성과 생명에 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합니다. 일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성교육은 제대로 시행되지도 않거니와, 성에 대한 가치관 교육보다는 청소년들의 성행위를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피임만 잘 가르치면 된다는 식의 교육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교육은 청소년들의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으며, 왜곡된 성의식만 갖게 만들게 됩니다.

따라서 보통 성 개방 풍조가 만연한 오늘날 고루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남녀 간의 인격적인 소통과 참된 사랑을 키워나가는 미혼의 젊은이들에게 섣부른 성적인 관계는 오히려 두 사람의 진정한 관계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과, 오직 생명을 받아들이고 책임질 수 있는 혼인과 가정 안에서 자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성적 결합을 기다리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혼인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은 경제적 조건, 학벌, 외모 등 외적 조건보다 상대방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며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는 성숙한 인격을 지닌 사람인 지를 우선적으로 살피고 스스로 그러한 준비를 갖추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을 육체와 이기적인 쾌락으로만 여기는 세태에 맞서서 인간 전체를 풍요롭게 하도록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의 참된 의미를 배우고, 특히 생명을 전달하는 성적 결합은 혼인 안에서만 참된 의미가 있음을 젊은이들이 깨닫도록 교회와 부모가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가정공동체 66항 참조).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2년 9월호,
박정우 후고(신부, 서울 가톨릭대학교 종교사회학 교수)]



1,48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