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새로운 복자: 동정녀 공동체 회장 윤점혜 아가타 - 동정녀들의 아름다운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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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15 ㅣ No.1494

[새로운 복자] 동정녀 공동체 회장 : 윤점혜 아가타 (1) 동정녀들의 아름다운 신앙



우리나라 초기 신앙의 선조들은 정덕(貞德)을 참으로 고귀하게 여겨 이를 세 가지로 분류할 정도였습니다. 동정(童貞)을 최고로, 홀아비나 과부로 독신(獨身)의 정을 지키는 것을 그다음으로, 그리고 부부(夫婦)의 정을 지키는 것을 그다음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동정을 금(金)에, 그 나머지를 각각 은(銀)과 동(銅)에 비유하였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이처럼 정결을 신앙생활 안에서도 지고지순한 덕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덕을 고귀하게 여긴 복자 중 한 분이 바로 윤점혜 아가타입니다. 윤 아가타는 1776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로 이주해 살았습니다. 동생 윤운혜(루치아, 1801년 순교)와 함께 어머니 이씨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성가정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더욱이 윤 아가타는 성직자 영입을 위하여 밀사로 파견되었던 윤유일(바오로, 1795년 순교)과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야고보)와 사촌지간이었습니다.
 
윤 아가타는 어렸을 때부터 가정의 신앙적 분위기 안에서 교회 서적을 읽고 삶으로 살면서 자연스럽게 동정 생활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당시 처녀가 결혼하지 않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기에, 가족과 친척들의 반대가 심하였습니다. 윤 아가타는 이러한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갑니다. 그 예 중 하나로, 어머니가 아가타를 혼인시키려 하자 아가타는 어머니가 준비해놓았던 자신의 혼수 옷감으로 남자 옷을 만들어 입고 몰래 집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평소 입던 자신의 옷에 동물의 피를 묻혀 뒷산 나무에 걸어놓고는 자신은 죽은 것처럼 가장한 후 사촌 오빠 윤 바오로의 집에서 숨어 지냅니다. 이후 윤 바오로의 설득으로 겨우 집에 돌아온 아가타는 가족들의 질책과 반대에 다시금 봉착하게 됩니다. 이때 어머니는 아가타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어 안아 줍니다.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1795년)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윤 아가타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합니다. 그 이후로는 머리에 쪽을 찌고 과부로 행세하면서 동정을 지켜나갑니다. 2년 뒤, 윤 아가타는 주문모 신부에게서 아가타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윤 아가타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1801년 순교)의 집에서 생활합니다. 그곳에서 주문모 신부와 강 골롬바의 도움을 받아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어, 다른 동정녀들과 더불어 살면서 교리를 공부하며 동정녀회 회장으로서 적극적으로 교회 일을 돕는 공동체로 성장시킵니다.

윤 아가타는 교회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극기 생활과 성경 읽기에 열중하여 많은 이에게 모범적인 생활로 그 향기를 드높입니다. 그녀는 생전에 병자성사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불쌍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연도를 자주 바쳤고, 아가타 성녀처럼 동정으로 깨끗하고 순수한 신앙의 마음으로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며 살아갑니다. [2015년 6월 14일 연중 제11주일 수원주보 4면, 최인각 바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새로운 복자] 우유 핏빛 동정 순교자 : 윤점혜 아가타 (2) 동정녀들의 아름다운 신앙



윤점혜 아가타는 동정녀 공동체를 이루며 회장으로 열심히 살아가던 어느 날 묵상 중에 환시를 봅니다. 성모님 위로 성령께서 내려오는 환시 말입니다. 윤 아가타는 너무 놀랍고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믿기 어려워 주문모 신부님에게 여쭈어봅니다. 이에 신부님은 “이는 실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나에게 그런 모양의 상본이 있는데 한 번 보십시오.”라고 하며 상본을 보여줍니다. 윤 아가타가 그 상본을 보니, 정말로 자신이 묵상 중에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윤 아가타는 더욱더 성모님의 정결한 마음을 닮아 주님을 사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그분의 고통에 동참해야겠다고 다짐하고는 순교 원의를 굳게 다져갑니다.

그 무렵 동생 윤운혜(루치아)는 정광수(바르나바)와 혼인하여 한양으로 이주하여 살림을 마련합니다. 동생 부부가 한양으로 올라오자, 윤 아가타는 동생 부부가 교회 일을 도울 수 있도록 주선해줍니다. 동생 부부도 이에 부응하여 집 한켠을 집회소로 제공하고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가 미사를 봉헌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한마음으로 상본을 그리거나 성상과 묵주를 만들고,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주면서 교회 서적과 성물 보급에 앞장섭니다.

이렇게 2년 정도의 세월이 지났을 무렵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윤 아가타는 함께 생활하던 강완숙(골롬바) 회장, 동생 부부 등과 함께 체포됩니다. 체포된 윤 아가타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험악하고도 집요하게 요구해오는 밀고와 배교 요청을 굳건한 신앙으로 물리치고, 대신 어마어마하게 다가오는 무서운 형벌을 받아들입니다. 아가타는 형조에서의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0년 동안이나 천주님에 대한 신앙을 깊이 믿고 맹세하였는데, 어떻게 죽을 형벌을 무서워하며 신앙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박해자들도 더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형을 선고하고는, 고향인 양근에서 처형토록 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합니다. 사형 직전 양근으로 이송된 윤 아가타의 수감 생활을 지켜보던 이들은 “아가타가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오히려 아주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습니다.”라고 증언했다고 합니다.

윤 아가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는데, 이 순교의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휘광이의 칼날이 아가타의 목을 베자 그녀의 목에서 우윳빛의 흰색 피가 흐르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흘린 지상에서의 순교의 붉은 피는 우윳빛이 나는 보배로운 피로 바뀌었고, 지상에서의 깨끗하고 정성 지극한 동정의 삶은 천상에서 더없이 영예로운 동정 순교의 월계관으로 보상받았습니다. [2015년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수원주보 4면, 최인각 바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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