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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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기쁨 해설47: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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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2-14 ㅣ No.731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47)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인류 위기 가리는 '보이지 않는 손'



공동선과 사회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富)의 재분배와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 그리고 인권이 온전히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교황은 이를 위한 원칙 4가지를 제시하였다. 그 가운데 세 번째를 다루고자 한다.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알듯말듯하다. 개념이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조금 더 그분의 생각과 사상을 살펴보자.


현실의 위기를 포장하는 이론들

교황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현재가 위기이고 이것이 ‘실재’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론으로 포장하여 모두를 현혹하는 사상과 생각들에 대한 경계를 분명히 한다. 더는 무관심의 세계화도 방관할 수 없다. 실재를 바라보아야 한다. 생각을 다듬고 포장하여 그럴듯한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더는 묵과할 수 없다. 시장경제의 절대적 자율성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다. 검증되지 않은 낙수효과를 믿을 수 없다(54항 참조).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이론이나 자본주의자들의 이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 우리는 더는 시장의 눈먼 힘과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하지 않는다.

시장경제는 그것이 국제적이건 국내적이건 간에 공동선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세계화된 오늘날,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규범에 입각한 경제 질서가 정치적으로 확립되어야 한다. 이는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회칙 「백주년」(Centesimus annus)에서 강조하신 바이기도 하다(「백주년」 42항 참조). 정치 지도자들이나 경제 부문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그만큼 막중하다.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교황이 제시한 세 번째 원칙의 의미가 조금 더 가깝게 이해된다. 사회 경제적 이념(ideoligia)의 상당 부분이 실재와 다르다는 것이다. 아니 아예 반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의하게 다듬어진 이념들이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무관심의 세계화’(54항 참조)를 부추기면서, 힘(권력)의 불의한 관계들을 적당하게 포장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가난한 이들을 우선해야 된다는 그리스도교 정신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림자 걷어내고 현실 직시해야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는 원칙을 통해, 교황은 ‘실재’를 보지 못하도록 그림자를 드리우는 온갖 수단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재는 사실 그대로이지만, 생각은 다듬어지기 때문이다. 곧 천사 같은 순수주의, 상대주의의 독재, 공허한 미사여구,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 반역사적 근본주의, 선의가 없는 도덕주의, 지혜가 없는 지성주의 등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31항). 형식적인 유명론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객관성으로 실재를 응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실은 왜곡되고 겉치장이 신체단련을 대신하고 맙니다”(232항). 우리의 ‘실재’는 어떠한가? 배척과 퇴출의 경제 사회 구조 속에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절규가 하늘에까지 오르고, 주변 이웃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뒷짐 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실재’가 아닌가!

교황은 「치빌타 카톨리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방(최전선)의 삶을 작위적으로 조련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오히려 최전방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 변방을 조금 색칠하기 위해, 그리고 모두의 구미에 맞게 다듬기 위해 집으로 가져와서는 안 됩니다”(「두 분 교황님과 함께」 79쪽 참조). 작업실에서 ‘실재’를 조작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교황은 실재의 현장에서 그 문제를 이해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생각’이 ‘실재’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지속적인 대화가 가능해야 한다. 교황은 이를 위해(생각과 실재의 지속적인 대화를 위해) 현장의 삶을 강조했다.


삶의 현장으로

하느님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 삶의 현장으로 오셨다.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면, 관념적인 구원을 말하는 영지주의에 빠지고 만다. 우리도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지 않고 영적 안정과 평화의 말씀으로만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 “말씀과 실재를 일치시키지 않는다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고, 순전히 생각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며, 결국 활력도 없고 결실도 없는 자기중심주의에 빠져버리고 만다”(233항).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13일, 홍기선 신부(춘천교구 사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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