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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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엘리사벳의 환희와 성모님의 마니피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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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08 ㅣ No.396

[레지오 영성] 엘리사벳의 환희와 성모님의 ‘마니피캇’



삶의 도상에서 인생의 방향을 온전히 틀어놓고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며 세상의 시간을 영원히 멈추게 만드는 만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만남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만남을 눈여겨보려는 이유는 바로 나(우리)를 위하여(?π?ρ ?μο?)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던 것처럼,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던 것처럼(서정주), 눈물의 골짜기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의 노래를 들려주시려고 그 만남이 성사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늘과 연결되는 기쁨을 주시려고, 우리 안에 하늘을 가져다주는 희망을 주시려고, 성령께서는 엘리사벳의 입으로부터 탄성이 터지게 했고 성모님의 가슴으로부터 찬가(Manificat)가 울려 퍼지게 했던 것입니다.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환희는 우리를 믿음 중의 믿음으로 인도하고,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찬가는 우리를 감동 중의 감동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잊을 수 없는 그때의 그 기쁨을, 가눌 수 없는 지금의 이 감동을,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솟구칠 이 희망을 레지오 단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이 성모님의 삶을 온전히 덮어

성 아오스딩은 “Fides in mente, Christus in ventre”(Sermo 196.1; cf., S. 215; S. 245.4), 곧 성모님께서 그리스도를 당신 태 안에 잉태하시기 전에, 당신 영혼 안에 먼저 잉태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각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그분 자체를 이미 당신의 십자가로 짊어지고 계시는 성모님을 바라보게끔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죽음 이후에까지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당신의 육신과 영혼, 그리고 당신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모시고 사셨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이 성모님 삶의 모든 순간순간을 온전히 덮고(obumbro)[1] 있었던 것입니다.

이 현존은 성모님께서 잉태하신 몸으로 엘리사벳을 방문[2](루카 1,39-54)했을 때, 극에 달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만남은 마치 다윗이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가는 기쁨(옷이 벗겨진 것도 모를 만큼), 곧 성모님께서 하늘의 현존인 아기 예수님을 당신 태중에 안치하고 예루살렘(시온)으로 입성하는 기쁨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늘과 땅이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이 연결 앞에서, 엘리사벳은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세례자 요한이 춤을 추었다고 외쳤습니다. 이는 엘리사벳이 보이는 것 안에 계시고 동시에 보이는 것 너머에 계시는 분을 보고 있는 동안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요한은 보지 않고도 그분을 믿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장면이 되겠습니다. 육신적인 눈에는 감추어져 있었지만, 영신적인 믿음의 눈은 성모님의 태 안에 분명히 실재하고 있는 “감추어진 하느님의 현존”이 육으로 우리와 연결되고 있음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현존이 자신(전인류)에게 두 손을 쭉 뻗어 도킹(docking)하고 있었습니다.

이 결정적인 만남 앞에서 그들의 믿음은 자신들의 가슴을 열어젖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말할 수 없는 기쁨까지 샘솟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벳 뱃속 깊숙한 곳에서 솟아 올라와 온 존재 전체를 환호로 가득 차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방문(현존)을 보고 있는 엘리사벳 모자(母子)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이들 모자가 더 놀라고 있는 것은, 이 엄청난 현존이 참으로 우리 가운데 와계시게끔 가능하게 만든 분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느님 현존의 살아있는 주물의 틀(鑄型)이 바로 눈앞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기쁨과 희망의 이중주가 울려 퍼지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성모님 안에서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길(통로) 뚫려

엘리사벳은 하느님과 우리가 연결되고 있는 근원(이유)이 성모님이라는 장소[3]를 통하여 성사되고 있음을, 곧 성모님의 존재론적 가치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분이 계실 수 있도록 먼저 성전이 되셨고, 참으로 모든 이가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만남의 광장이 되셨음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인간이 하느님을 담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성모님 안에서 모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태는 부정적인 의미(하느님의 입장)에서는, 그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 참된 순수한 영이신 하느님께서 한 인간 성모님 안에 영원히 갇혀 버렸다(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반면 긍정적인 의미(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느님의 존재(본성, 자유, 의지, 마음)가 이 세상 안에, 곧 우리 인간의 본성 안에 주소지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명확한 주소지를 가졌기에, 이제 우리는 그곳으로 편지를 쓸 수도 있고 소포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모님 안에서 하느님과 우리 모두가 만날 수 있는 길(통로)이 뚫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허공을 향해 “하느님이 어디 계시는가?”라는 욥의 절망적인 탄식을 내뱉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성모님의 품에 안기면 됩니다. 성모님은 당신 안에 하늘을 품고 있으니까요. 당신 안에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로고스(다리/통로)를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참으로 성모님은 인간의 몸으로, 가녀린 여인의 팔로, 따뜻한 엄마의 가슴으로, 하지만 하늘의 마음으로 우리를 껴안아주고 있습니다. 한쪽 팔은 한 인간 어머니의 한없는 슬픔과 연민으로, 다른 팔은 하늘이신 당신 아드님의 거룩한 상처로 아픔 투성이, 눈물 투성이, 죄악 투성이인 우리를 감싸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늘의 마음과 인간의 가슴으로 우리를 껴안아주시려고 한 순간도 서있을 수 없는 십자가 아래에 당신은 서계셔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어머니가 되셔야 했고 어머니의 직책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곧 하늘의 아픔과 우리를 연결시켜 주시려고, 당신 아드님의 고통과 당신의 슬픔을 우리에게 전해주시려고, 그렇게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려고 당신은 모든 사람이 떠나버린 그곳에 서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숨을 거두기 바로 직전,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가장 큰 고통의 비애를 겪고 있는 당신의 어머니(하늘)를 제자들의 어머니(땅)이자 교회의 어머니(통로)로서 세우기 위해서요(베네딕도 교황). 그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신의 집”[4]에 모셨네요. 그렇습니다. 눈물 젖은 빵을 드셔야 했기에, 눈물이 얼마나 짠지를 맛보셔야 했기에, 참으로 슬픔의 골짜기에 살아야 하는 어머니가 되셔야 했기에,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하늘과 맞닿을 수 있기에 당신은 십자가 아래에 서계셨던 것입니다.


성모님 안에서 내 눈물은 그리스도의 피땀과 만나

그런데 이 모진 운명과 직책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답가로 불렀던 찬가(Manificat) 속에 이미 들어있던 내용이었습니다. 이 시나리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희망 찬 미래였지만 당신에게는 비극적 운명으로 다가오는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신에게는 아픔과 슬픔이 되지만 우리에게는 기쁨과 희망이 되기 때문에 어머니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당신이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작 당신은 영혼 속으로 눈물을 삼키시면 서도 나(우리)를 위하여 그 슬픈 노래를 기쁨과 희망의 찬가로 기쁘게 불렀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 영혼의 슬픈 노래가 성모님의 피에타 안에서 정화되고 기쁨의 환희로 바뀌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모님 안에서 내 눈물은 그리스도의 피땀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나)의 과거는 이스라엘(모든 인류)의 미래였고, 지금까지 내 마음 속을 적셨던 슬픔의 눈물은 성모님께서 주신 기쁨(연결)과 희망(현존)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노래를 우리 영혼의 찬가로 만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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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σκηνοω, επισκηνοω: “그림자를 드리우다(tent)”, 혹은 영성적인 의미로서 “살다(dwell), 거주하다(reside)”, Louw Nida 85.7: 참고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은 “온전히 덮고, 온전히 감싸고 있다”는 더 심층적인 뜻을 지닌 단어를 사용했다.

[2] 초대교회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3마일 정도 떨어진 언덕에 있는 아인 카림(카렘)이라는 마을이다. 이곳에 엘리사벳 방문성당이 있는데 입구에1943년 바티칸에서 제작된 모자이크(성모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가 있다.

[3] Locutus est oculus Dei : 장소가 하느님의 눈이다. 연결로 말미암아 양심이라는 장소는 하느님의 마음이 된다. 인간(장소) 안에서 일어나는 고통은 하느님 안에서 일어나는 고통이 된다. 십자가는 세상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작업장(장소)이 된다.

[4] 요한복음 19,27: 여기서 자신의 집(ειs τα ιδια)은 자기 내면, 곧 자기 삶의 내면의 원리로 삼았다는 뜻이다. cf.,) 자캐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4월호, 전동혁 베드로 신부(마산교구 창원 사파공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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