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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54: 오도 카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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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8-05 ㅣ No.409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4) 오도 카젤 (하)

그리스도 구원 신비, 교회가 거행하는 예식 통해 드러나



도 카젤의 대표적 저서 「그리스도교 예배의 신비」.


신비와 전례의 관계

오도 카젤은 신비와 전례의 관계를 정립한 전례신학자이다.

신비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였다면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된 교회의 행위이다. 카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비는 육화한 아들의 행위와 교회의 구속과 치유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시로서 하느님이 영광스럽게 되시고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완전하게 되는 때, 곧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갈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예배의 신비 안에서 실제로 전달되고 이루어진다. 예배 안에서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당신의 구원 사업을 수행하시고 성령 안에서 현존하시면서 선한 뜻을 지닌 모든 사람들 위에서 활동하신다(루카 2,14 참조). 이 신비를 거행하는 이는 주님 자신이시다. 주님은 당신의 신부인 교회와 함께 그 신비를 거행하신다(에페 5,14-20 참조). 그리고 주님은 교회에 당신의 모든 보물을 전달해주며 교회는 자신의 후손들에게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전달한다.

치프리아노 교부가 “교회의 단일성에 대하여”(de Unitate Ecclesiae)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이후로 교회를 어머니로 모신다. 교회는 여인(하와)이 첫 번째 아담의 배우자가 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리스도의 동료가 되고 구속사업의 협조자가 되었다.

교부들은 우리에게 주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물과 피를 통한 신비를 말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에서 태어났고 신비는 교회와 함께한다고 가르친다(아우구스티노, ‘요한복음해제’ Tractatus in Ioannem 120,2 참조). 그래서 교회와 신비는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예배의 신비가 전례가 된 결정적 요인이다.


전례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신비

전례(Liturgia)라는 그리스어의 의미는 도시에 봉사하는 개인 활동을 의미했다. 예를 들면 ‘전쟁에 쓰일 배를 만든다든가, 디오니시우스의 명예를 다룬 비극을 공연하는 합창단에 지원하는 일 등이었다. 이 용어는 초기 그리스도교에 들어오면서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공적 예배에서의 개인적 활동을 뜻했다. 이런 관점에서 전례는 구약과 신약에서 사용되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전 안에서 그의 전례를 수행했다(루카 1,23). 로마의 성 클레멘스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전례는 신약성경의 봉사 모델이 되었다. 신약성경이 삶 전체의 거룩함과 하느님께 대한 봉사를 다루었다면, 교부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공통된 예배행위에 특별하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예식적 의미에서 구약성경에서의 전례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궁극적이고 가장 완전한 옛 계약의 완성을 드러내는 명백하고 고귀한 실재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그 신비를 교회의 고유한 예배의 신비로서의 전례로 가져왔을 때, 옛 계약은 새롭고 더 높은 차원의 실재를 형성하고 표현하며 새로운 예식 안에서 완성하였다.


신랑인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로 인해 생겨난 신부인 교회의 전례

우리가 신비와 전례라는 단어를 나란히 놓았을 때 신비는 ‘예배의 신비’로 사용되며 이때 신비와 전례는 동일한 내용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라 하겠다. 신비는 전례행위의 심장 곧, 주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행위들을 통해 약속했던 부활하신 주님의 구속 사업을 의미한다. 전례는 ‘사람들의 일, 봉사’라는 본래의 언어적 의미와 연결되어 교회의 활동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와 연결되는 측면이 더욱 강하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신비 안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함께 활동한다. 그러나 이렇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활동을 명확하게 분리할 수 없어도 신비는 신랑의 활동으로, 전례는 신부의 활동으로 특징 지울 수 있다. 교회가 외적인 예식들을 거행할 때 그리스도는 그 예식들에서 내적으로 활동하신다. 따라서 교회는 실제로 신비를 거행한다. 교회의 신비 거행은 여전히 교회의 예식적인 행위를 드러내기 위한 고유한 방식이라는 의미에서 ‘전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새로운 계약의 신비는 어떻게 전례가 되었는가?


교회 전례는 주님에 의해 명령됐고 성령을 통해 내적 충만성을 유지한다

새로운 계약의 신비를 드러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그 신비를 제공하셨다. 곧 신비의 본질적인 내용과 형식은 주님께서 직접 설립하셨고 명령하셨다. 주님께서는 교회가 행해야 하는 바를 알려주셨는데, 무엇이 필수적인지 혹은 공동적인 예식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세부 사항은 언급하지 않은 채, 행해야 하는 바를 알려주셨다. 다만 교회에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시어 교회에게 그러한 능력들을 부여해주셨고 성령을 통하여 교회에 위탁한 그 신비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무궁무진한 보물을 암시하셨다. 또한 새로운 언어들과 표현들을 통하여 그것을 발전시켜 후손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를 움직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찬양하도록 한다.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선함은 교회가 후손들을 충실히 돌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설명하도록 이끌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들 자신의 것이 되게 한다. 그래서 성령과 사랑의 충만함으로부터 태어난 전례는 아름다움과 현명함의 활동이 된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인간학적 조건 안에서 표현된다

신비의 고유한 요소는 그에 합당한 행동과 주님께서 직접 전해주신 말씀으로 이뤄진다. 주님께서는 가르치거나 새로운 구원을 알려주기 위해 전혀 새로운 방식을 만들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인류가 이미 알고 있는 오래된 방법을 사용하셨고, 그것을 변형하고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세례에 대한 생각과 어떤 형식들은 대부분 인류 안에서 존재하던 것으로 죄를 정화하거나 새롭고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표현하거나 사실화할 때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특히 외적인 예식과 사용된 재료들은 삶의 자연적인 활동과 연관되어 있으며 자연이 생성한 것으로,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정착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물은 물이다. 물이 정화의 자연적인 예식에 사용되거나 고도로 정교해진 예식에 사용된다 하더라도 물은 물이다.

말은 자유롭고 더 쉽게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은 또한 그것이 형성되어온 언어와 연관된다. 하느님은 자신을 계시하기 위하여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례 역시도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의 표현방법과 방식을 사용한다. 예식에 사용되는 텍스트들은 성경의 하느님 말씀에 따른 것이다. 예식에서 성령은 스스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인간의 입을 통하여 복음을 선포한다. 새로운 형식, 새로운 차원을 생성하는 가운데에서도 성경은 전례 안에서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 이 기록을 통해서 그 최초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카젤은 그의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교 예배의 신비」(Das christliche Kultmysterium)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님 안에서 충만하고 역사적이며 본질적인 진리에 따라 완성된 그리스도의 신비는 우리 안에서 상징적 형태들로 실행된다. 이것들은 단순한 외적 이미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은 새 생명의 실재에 의해 생명력을 지닌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특별하게 참여하는 것은 한 부분은 상징이고 다른 부분은 실재이다. 예전 사람들은 이를 신비라고 부른다. 신비는 단순한 이미지와 참되고 본래적인 실재 사이의 어떤 매개체(quid medium)이다.”

비록, 과거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원사건과 현재 교회가 거행하는 전례 사이의 효과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으며, 헬레니즘의 신비에 대한 개념과 너무나 유사하기에 생기는 우려 등이 있기는 하지만, 카젤은 그리스도께서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신 약속을 성령의 활동 안에서 교회가 거행하는 전례를 통해 지키고 계심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으로 완성된 구원 신비가 교회에서 상징적 예식을 통한 예배 신비로 드러났음을 이해하고 전례에 능동적으로 온전하게 참여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례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서 삶의 터전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며 또 다른 ‘그리스도의 신비’로 살아가기를 오도 카젤은 원할 것이다.

[평화신문, 2014년 8월 3일, 
윤종식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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