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강론자료

2016-03-26.....부활성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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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6-03-26 ㅣ No.2019

 

부활성야(復活聖夜) - 다해

1독서 : 창세기 1,1-2,2         2독서 : 창세기 22,1-18        3독서 : 탈출기 14,15-15,1

4독서 : 이사야 55,5-14         5독서 : 이사 55,1-11          6독서 : 바룩 3,9-15.32-4,4

7독서 : 에제키엘 36,16-17.18-28      신약독서: 로마 6,3-11     복음: 루카 24,1-12

 

2016. 3. 26. (). 이태원

주제 : 예수님의 부활을 대하는 자세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여러분은 부활(復活)’이라는 말을 실감하십니까? ‘실제로 체험하는 느낌이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실감하느냐고 묻는 부활에 대하여, 사람은 감정이 다르겠지만, 이 부활의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생각으로 첫 머리에 인사했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어떤 느낌을 가지면 부활은 실감나는 일이 되고, 어떤 것을 느끼지 못하면 부활은 실감하지 못할 일이 되는지, 이 두 가지 사이를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는 원칙은 있겠지만, 이 소리를 듣기 이전에 죽었던 경험과 그 죽었던 일에서 살아난 경험이 없다면, 이 질문을 구별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이 세상의 삶을 통하여 경험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이 구별은 신앙에서 올바른 것으로 생각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 또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요? 이 질문에 긍정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운 일이기에, 신앙에서는 부활의 기쁨을 밤에 잠들었다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로 비유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삶에서 자주 반복하는 일은 부활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부활이란 나의 삶에서 얼마나 거리가 있는 것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합니다.

 

부활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다시 살아남이라고 사전에서 설명하는 정답은 우리가 외우기만 하면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니 잘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실제의 경험으로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어야 좋을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얘기하는 밤, 부활성야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개인적으로는 부활을 체험한 일이 없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그래도 우리는 부활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실제 경험에서는 만난 일이 없다고 할 테니, 부활의 뜻은 신앙의 해석을 말씀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세상의 언어로 설명하면, 부활을 설명하는 표현은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말씀을 들었지만, 세상의 우리말사전이 설명하는 것처럼, 신앙에서 부활을 설명하는 표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이 시작되기 직전,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서둘러 안장한 것을 봤던 3명의 여인들이, 자기들의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된 안식일 다음날 새벽이 되자 예수님을 모셨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했던 그녀들이 본 첫째 모습은 무덤을 막았던 커다란 돌이 굴러나 있던 것이었고, 두 번째 모습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두 명의 젊은 남자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부활이 무엇인지 그들은 자기의 눈으로 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현실에서 그 놀라운 일을 눈으로 본 것을 기준으로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여권신장이 된 요즘의 세상과는 다르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 세상은 여자들의 증언을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주지 않던 세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선택이라고 해도 참으로 묘한 것이 그것입니다. 하느님은 신빙성이 있다고 취급하던 남자들의 증언을 빼고, 어찌하여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첫 번째 증인으로 여인들을 선택하셨을까요? 세상의 그런 현실을 모르시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하느님은 세상이 옳은 것으로 인정하던 방법을 왜 선택하지 않으셨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에도 찾아가지도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전하는 소식을 신빙성이 있는 소리로 듣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이렇게 짤막한 소식을 들으면서, 남자는 세상에서 큰소리를 치는 존재들이지만, 신앙을 전달하고 증언하는 일에는 큰 역할을 하지 않는 존재라고 단정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듣기 전, 우리는 몇 개의 독서를 들었습니다. 그 말씀들을 간단하게 요약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독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전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아주 다른 세상의 창조에 관한 신앙의 얘기입니다. 두 번째, 탈출기의 말씀은 히브리백성들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마치고 갈대바다를 건넌 이야기,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간, 파스카이야기였습니다. 세 번째, 이사야예언서의 말씀은 우리가 언제 어느 순간에 하느님을 찾아야 하느냐는 예언자의 선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런 내용을 듣지 않아도, ‘내가 필요할 때(!)에는 하느님을 너도나도 예외는 없이 부르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해도 좋은 일인지에 대한 판단은 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끝으로 들은 에제키엘예언자의 선포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판단기준을 말합니다. 인간의 행동이 하느님을 부르거나 거부하는 일에 대해서, 하느님은 서로 다른 미래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이 이리저리하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그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수난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부활은 없겠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죄에서 멀어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은총의 순간을 우리는 얼마나 잘 보존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살아나신 부활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실현될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받거나 거부하는 것은 내 선택입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로 우리가 기념하는 일이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언제나 반복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실제로 우리의 삶에도 부활이라는 기적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를 확인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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