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교의신학ㅣ교부학

[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59: 루이 부이에 (중)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4 ㅣ No.415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9) 루이 부이에 (중)

영성생활, 외적 활동에 더불어 영적 믿음 동반해야



부이에 영성신학의 특징

루이 부이에의 영성신학에는 그만의 독특한 면이 있다.

19~20세기에 출판된 영성신학 개론서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영성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저서 내용을 구성할 때도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담아 다양하게 저술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루이 부이에가 저술한 영성신학 개론서에는 그만이 담아낼 수 있는 또 다른 독특한 측면이 있다. 즉, 같은 내용을 설명하더라도 부이에는 또 다른 관점에서 보다 더 포괄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부이에의 개성이 더욱 드러나는 몇몇 영성신학 주제를 선정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영성생활의 올바른 이해

다른 영성신학 개론서와 마찬가지로 부이에는 「영성생활입문」(Introduction la vie spirituelle)에서 먼저 가톨릭교회의 영성생활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전통에 따른 영성생활을 독자들에게 올바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부이에는 다른 여타 종교와 비교하며 영성생활과 유사한 개념에 혼돈을 일으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먼저 부이에는 라틴계의 오래된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종교에 속한 사람은 “어떤 형식을 정확하게 반복함으로써 예식을 수행하는 일 이외의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키케로가 소개하는 코타와 같은 제사장은 개인적으로 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그에게 “오로지 예식을 잘 수행하는 것과 정해진 기도문을 잘 읽어 달라는 것”만 요구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이에에 따르면, 공교롭게도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서도 이와 유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자신의 종교를 오로지 ‘선행’이나 ‘실천’만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행과 사회봉사에 아낌없이 그들 자신을 바치는 자선 행위를 종교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전부로 이해되기도 하고 또는 적어도 그리스도교의 원리가 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을 부이에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과 현상은 한국교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신자들은 주일 미사뿐 아니라 평일 미사까지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성당 행사에서 봉사활동을 하거나 신심 단체에서 의무로 주어진 희생을 빠지지 않고 실천했을 때에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영적으로 발전하는 영성생활을 실천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열거한 예들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실천한 내용이기에 종교생활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종교생활이 곧 영성생활이라고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 부이에는 바로 이 점을 혼동하지 말라고 언급하였다. 즉, 전례 참석의 의무를 다하고 희생 봉사의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고 하더라도 고대 종교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마음 없이 외적인 형식으로만 실천되었다면 영성생활과 연관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참된 영성생활이 되려면 외적인 형식에 영적 발전을 갈망하는 진솔한 마음도 함께 실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영성생활

다음으로 부이에는 순수하고 원초적인 불교 형태를 살펴보았다. 부이에에 따르면, 이러한 불교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없는 종교’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불교를 모든 다른 종교와는 분리된 영성의 한 형태로 일종의 ‘영성생활’이라고” 해둔다면 “역설적인 ‘영성생활’의 차원을 찾아볼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즉, “부처가 설교하는 ‘영성생활’이란 원래는 우주적이든, 인간적이든, 신적이든 간에 모든 존재에 관한 절대적인 무관심인 이 이탈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그러한 체험은 단지 심리적인 체험이거나 궁극적으로 허무한 체험이 될 수도 있다고 부이에는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종교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대상으로 하느님과 같은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인은 하느님을 찾기보다는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을 즐겨 한다. 게다가 외부 세계로부터 어떤 자극이 가해지더라도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심리적인 차원에서 마음으로부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면 영성생활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다른 종교, 심지어 하느님이 없는 종교가 제시하는 영성생활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삶의 모습이 아무리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교인이 실천해야 하는 영성생활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에 기반을 두지 않고 실천되는 형식에 기반을 둔 영성생활은 그리스도교인의 영성생활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적 생활과 영성생활

마지막으로 부이에는 내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부이에에 따르면, “종교적인 것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성생활’의 의미를 아무리 확대한다 하더라도 ‘영성생활’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도 찾아볼 수 없는 … 완전한 무신론자들이며 자칭 유물론자들이라고 하는 시인들이나 예술가들도 순전히 그들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과 사상 또는 감정을 체험하고 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인들의 “체험들은 흔히 혼동하리만큼 신비적 체험의 형태를 상기시키기도”하기 때문에 “이러한 내적 생활이 나름대로 매우 풍요로운 생활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가 없다”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이에는 시인들이 “깊은 종교적 성찰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적 체험이 그것을 느끼는 인간 이외의 다른 실재에까지 확대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매우 의심스럽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부이에는 초자연적 질서에 참여하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 그리스도교 영성생활과 내적 생활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즉, 아무리 자신의 내면을 깊게 성찰하여 감동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거기까지는 내적 생활일 뿐이고, 그 수준을 넘어서서 초자연적 질서에로 나아가는 발전의 여정이 뒤따라야만 영성생활을 실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개신교의 영성생활

부이에는 가톨릭 전통에 따른 영성생활의 특징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개신교 영성생활의 관점과도 비교하였다. 부이에에 따르면, 개신교에서는 영성생활을 내면화시키고, 개인화시키는 데 주안점을 둔다. 왜냐하면 개신교 신자들은 캘빈(Calvin)의 주장에 따라 성령께서 직접 주신다고 여기는 ‘내적 증언’에 의해 하느님 말씀을 발견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신교는 “복음서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인격과 신자 개개인 인격의 상호 관계와 공존으로부터 나오는 영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고 부이에는 고찰하였다.

물론 하느님께 직접 계시받은 신앙을 마음에 간직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영적 여정을 걸어가고자 하는 것이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부이에는 이러한 관점에는 부족한 것이 있다고 본다. 부이에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과 다른 신자들과의 동등한 공존의 실현이 없이 참된 그리스도교적 영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즉, 하느님 사랑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이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실천할 때에야 비로소 가톨릭 전통에 따른 영성생활의 핵심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성생활을 정의내리는 데에도 다양한 종교의 관점을 두루 살폈던 것이 바로 부이에만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평화신문, 2014년 9월 21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영성신학 교수,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2,23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