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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살며 배우는 사회교리: 사회교리와 처음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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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2-04 ㅣ No.813

[살며 배우는 사회교리] 사회교리와 처음 만나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과 함께 사회교리를 공부하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점은 사회교리가 너무 어렵다는 점이다. 필기시험도 보고 세미나 형식으로 발표 수업도 해보고 다양한 방법론을 구사해 보았지만 대부분의 세미나 발표 뒤에 일관되게 사회교리의 한계점을 비판하였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사회교리는 너무나 형식적이고 이론적이고 어렵다는 것이다. 사회교리를 전공하여 사회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인 나에게 이러한 사회교리에 대한 평가는 사회교리를 널리 선포할 사람으로서의 사명감을 더욱더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교리가 그렇게도 어렵고 추상적이라는 말인가? 사회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가르침으로 주는 이 사회교리가 그렇게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회교리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사회교리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비록 ‘교리’란 표현이 주는 어감 때문에 느끼는 딱딱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하더라도 사회교리는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가장 실천적인 교회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사회교리’라는 표현보다는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올 한해 사회교리의 각 주제들을 나의 사건과 경험을 중심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세상 속에서 신앙인들에게 생각거리, 실천거리, 살아갈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군부독재 정권과 교복 자율화

 

내가 처음으로 사회교리를 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등학교 시절 주일학교에서였다. 1980년대 군부독재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절, 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였다.

 

중학생 시절 초반에는 검정색 교복과 국방색 날개 달린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녔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새 권력자는 ‘정의사회 구현’을 기치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정권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애를 썼다. 나라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교복 자율화’라는 결정은 일반 학생들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허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외적인 면에서는 어느 정도 자율성을 지니고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까지 사회 안에서는 엄격한 통제와 규율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억압된 사회구조 속에서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 학교 정규수업 시간에 체육과 교련에 관련된 시간이 정규과목으로 있었고, 학교에서는 학생과 생활지도 선생님들의 몽둥이찜질이 우리들의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비록 교복이라는 전제주의적인 제복에서 자유로워졌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외부적인 억압으로 통제된 사회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며 살고 있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1980년 광주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성당에 다니는 대학생 형, 누나들은 항상 사회 문제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세상이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사회 문제를 언급하는 신부는 빨갱이(?)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국민윤리 시간에는 국가와 종교가 엄연히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었다. 관제화된 선생님의 가르침을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던 나 역시 성당에서 주일미사 때 사회적인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는 본당신부님들의 강론을 접할 때면 저 신부님은 혹시 빨갱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왜 저 신부님은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은 어찌 보면 당시 고등학교를 다니던 대부분의 학생들이 생각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잘 보아서 높은 점수로 이른바 일류대학을 가면 그것이 성공하는 것인 줄 알았다. 사회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고,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된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나 자신만 성공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던 부속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최루탄이 터지는 등하교 길에서도 왜 저 대학생 형들은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저리도 폭력적으로 데모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학생의 임무는 공부를 잘하는 것이고 정치적인 문제는 정치인들의 역할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던 대학생들의 구호가 공산주의자들이 외치는 반정부적인 구호로만 들렸던 것이다.

 

 

신앙을 택할 것인가, 나라를 택할 것인가

 

그러던 어느 날, 토요 특전미사였던 주일학교 중고등부 미사를 마치고 교리 선생님이 아주 특별한 주제를 우리 학생들에게 던져주었다. “만일 여러분이 신앙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나라를 선택할 것인지 둘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해야만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할 것입니까? 서로 토론해 보세요.”

 

이와 같은 토론 주제는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들에게 엇비슷한 공통의 답변을 내놓게 하였다. 그것은 바로 “나라가 있어야 신앙도 있을 수 있다. 패망한 월남을 보라. 그들은 나라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나 집 없이 신앙생활도 못하고 세상을 떠도는 난민 신세가 되지 않았는가! 따라서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선 나라를 구하고, 신앙의 자유는 그 뒤에 고민해도 될 것이다.”

 

대학생이었던 그 교리 선생님은 이러한 우리들의 결론에 대하여 뜻밖의 답변을 이야기해 주셨다.

 

“물론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셨을 거예요. 학교에서 그렇게 배우셨을 테니까요. 그러나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만일 이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국가가 아니라 제 신앙을 선택할 것입니다.

 

물론 두 개의 가치를 비교하는 일은 사실상 오늘날과 같은 현대의 상황에서 잘 일어나는 선택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선조였던 조선시대 말기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분들은 나라가 금지하는 천주학을 믿으면서 자신이 믿고 고백한 신앙 때문에 나라의 가르침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나라의 명을 거역하고 가족들의 회유도 거부하면서 자신들이 고백한 신앙의 진리를 지키려고 목숨을 바치신 분들이 바로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선조들이셨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학교에서 선생님들한테 배운 것이 모두 진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때까지 알고 있던 지식과는 너무나도 다른 가르침을 처음으로 받은 것이다.

 

그리고 성당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묻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만일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갑자기 신앙의 자유가 사라지고 내가 믿고 고백하는 천주교 신앙이 박해를 받게 되어 국가라고 하는 공권력에 의해 침해된다면 나는 과연 신앙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 나라를 지키려고 신앙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세상에 대한 질문의 해결점, 사회교리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 되고 있었다. 어떤 답변을 내려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고민은 대학입학 시험이라는 엄청난 무게 속에서도 한참 동안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주어진 수험생이란 신분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내 눈앞에는 대학입시라는 커다란 산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러한 고민은 일단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한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제가 되려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신학교에 입학한 해는 민주화가 결실을 맺은 1987년이었기에 서울 혜화동 낙산 자락에도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은 불고 있었다. 그래서 신학생들도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신학생다운 모습이었다. 우리는 신학교 정문 앞에서 다른 일반 학생들이나 시민들과 달리 민족의 아픔을 함께하며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신학교 출입문을 막아선 전투경찰들의 벽 앞에서 그저 우리는 경찰력의 분산을 목적으로 한다는 학생회 임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라의 아픔을 함께했다. 우리는 우리들의 방법대로 6·10 항쟁의 한 자리에서 시대의 아픔을 함께한 것이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지고 문민정부가 정권을 잡았다. 그러한 격변의 시대 안에서 나는 줄곧 묻곤 했다. ‘세상이 이렇게 불의하고 잘못되어 있다면 나는 신학생 신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교회가 세상과 권력의 불의 앞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도덕적인 가르침을 주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세상에 대한 질문들, 그리고 신앙과 정치에 대한 질문들은 이후 알게 된 사회교리를 통해서 서서히 그 구체적인 해결점을 찾을 수 있었다. 중 ·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달리 교회 안에도 사회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인 가르침을 전달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에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사회 문제에 대하여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던 신부님들의 목소리도 이러한 사회교리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음의 해방 말씀이 울려 퍼지도록 사회 상황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권리”(“간추린 사회교리”, 70항)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한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으로서 나의 정체성 그 중심점에 바로 사회교리가 있었다. 최소한 사회교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물음들이 서서히 풀려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교회의 사회적인 가르침으로서 ‘사회교리’와 처음 만났다.

 

* 황창희 알베르토 - 인천교구 신부. 1997년에 사제품을 받고, 로마 알폰소 신학원에서 석사,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에서 사회교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 인천 가톨릭 대학교 교학처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월호, 황창희 알베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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