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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모두를 위한 경제, 공유 경제: 모두를 위한 경제와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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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9-21 ㅣ No.1590

[경향 돋보기 - 모두를 위한 경제, 공유 경제] 모두를 위한 경제와 그리스도인

 

 

벼랑 끝에 선 자본주의

 

2008년 9월 14일 미국의 4대 투자 은행 중 하나였던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을 신청했다. 2007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생긴 결과였다. 미국이란 나라가 망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올 만큼 충격적이었고 그 여파도 대단했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은 곧이어 세계 금융 위기로 번졌다. 전 세계 경제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전 세계가 한창 몸살을 앓고 있을 때 1억 2천만 달러(약 1800억 원)의 4분기 영업 이익을 낸 기업이 있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대단한 성과였다. 그런데 이듬해 초 이 기업은 경영 계획을 발표하며 7천 명의 직원을 감원하고, 300개의 매장을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스타벅스’ 이야기다.

 

엄혹한 시기에 눈부신 성과를 올린 스타벅스 경영진이 구조 조정 카드부터 꺼내 든 것은 오로지 ‘숫자’ 때문이다. 2008년 4분기 순이익이 지난해 대비 70%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특히 증권사 분석 전문가들의 예측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적을 올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미래 가치를 반영한다는 주가에 좋은 신호일 수 없었다. 그 숫자를 맞추려고, 곧 순이익을 지난해 수준 이상으로 올려놓으려고 흔히 ‘고정비’라 일컫는 인건비와 시설 유지비를 줄이기로 한 것이다. 스타벅스 경영진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고의 선택을 한 것일 테다.

 

 

칼뱅과 자본주의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면 경영진의 결정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주가에 따라 자기 목을 매야 하는 경영진에게 언제까지나 도덕적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들의 결정은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이다. 기업이 사람보다 이윤을, 공공성보다는 효율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문화가 밑바탕에 있기에 그들도 큰 저항감 없이 그렇게 결정했다.

 

사람보다 이윤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우리는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따르면, 이 자본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과 함께 세상에 등장했다. 막스 베버가 볼 때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근대 시민 계급은 종교 개혁을, 그중에서도 특히 칼뱅주의를 수용한 사람들이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최선을 다해 일해 부자가 되더라도 방탕하게 살고 싶은 욕망을 통제하면서 근검절약하고 매사에 금욕하는 것을 윤리적인 행동이라고 보았다. 부를 쌓아도 쓰지를 않으니 쌓일 수밖에 없다. 자본이 축적되는 것이다.

 

그렇게 쌓은 부는 구원을 확인하는 증표처럼 받아들여졌다. 예정론 교리에 따르면 구원 여부가 이미 결정되었는데, 이를 아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직업적 소명에 부응해 성과를 내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본을 축적하는 행위가 윤리적인 정당성을 얻게 되었다.

 

사실 산업 사회가 등장하기 전 공동체 시대에는 부를 축적하는 행위가 저마다 은근히 바라기는 해도 드러내 놓고 자랑할 만한 덕목은 아니었다. 부자가 부러움의 대상이 될지언정 존경의 대상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칼뱅주의 덕분에 부는 윤리적인 정당성을 얻어 현실 속에 떳떳하게 얼굴을 드러냈다.

 

칼뱅주의가 스위스 제네바와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와 영국을 거쳐 청교도라는 이름으로 미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여기에 스코틀랜드 출신 경제학의 대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언급한 ‘보이지 않는 손’ 개념이 힘을 보탰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빵 굽는 사람들의 호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비판하는 대신 긍정했다. 각자가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더라도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수요와 공급을 맞춰 공적인 균형을 잡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후대 시장주의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이 개념을 확대해 이기심에 바탕을 둔 경제 활동을 독려했고, 기업도 이윤을 향한 탐욕까지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수도원 전통과 시민 경제

 

칼뱅에서 비롯한 청교도적 세계관과 애덤 스미스를 통해 강화된 시장주의는 분명 우리가 속한 사회의 경제 체제를 지배하고 있다. “기업은 이윤 추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집단이다.”라는 명제를 대부분이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영국과 미국을 통해 들어온 주류 경제학 말고는 없는 것일까?

 

앞서 언급한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자본주의 경제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비평이 쏟아지고, 그 대안으로 ‘사회적 경제’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익을 극대화하는 일반 기업 대신 사회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이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모범 사례를 찾으려고 미디어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찾았다. 볼로냐가 주도인 에밀리아로마냐주와 세계적 협동조합 몬드라곤이 버티고 있는 스페인 바스크 지역이 집중 조명되었다.

 

이들 지역의 공통점은 바로 가톨릭 신앙을 지켜 온 곳이란 사실이다. 가톨릭 신앙이 있는 모든 곳이 사회적 경제 체제를 확립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경제의 모범이라 불리는 곳은 예외 없이 가톨릭 신앙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이유가 있다. 사회적 경제라 부르는 ‘시민 경제’의 뿌리가 자본주의가 생기기 훨씬 이전인 수도원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이 몰락한 뒤 수도원은 유럽인들의 삶을 떠받치는 거의 유일한 경제적 기반이었다. 베네딕토수도회가 주창한 ‘노동’을 통해 공동체적 경제 활동이 일어났고, 프란치스코수도회의 ‘청빈’을 통해 무상성에 기반한 형제애(fraternity)의 전통이 뿌리내렸다.

 

이 전통 위에 애덤 스미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나폴리의 경제학자 안토니오 제노베시는 시민의 덕성(Civic Virtue)에 기반을 둔 ‘시민 경제’를 주창했다. 그에 따르면 시장은 이기심이 아니라 상호성에,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우선하는 형제애에 기반을 둬야 한다. 주류 경제학이 출발점으로 내세우는 ‘얼굴 없는 합리성’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세계 경제계의 관심이 영미의 주류 경제학에 쏠려 있을 때도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싹튼 시민 경제는 제 갈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지역은 생존을 위해 ‘협동’을 택했다. 포콜라레 운동을 창시한 키아라 루빅의 고향 트렌토는 인구 50만 명 중 54%인 27만 명이 협동조합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1956년 호세 마리아 신부와 다섯 제자가 노동자 생산협동조합인 ‘울고르’를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현재 몬드라곤에는 금융, 제조업, 유통, 지식 등 4개 부문 약 260개 회사가 속한 거대한 기업 연합체로 성장했다. 한해 매출액이 20조 원을 넘고, 자산 규모도 50조 원에 달한다. 8만 4000여 명의 노동자 가운데 출자금을 낸 조합원이 3만 5000여 명이다.

 

 

모두를 위한 경제와 대전 성심당

 

‘모두를 위한 경제’(이하 EoC)는 키아라 루빅이 주창한 경제 운동이다. 1991년 브라질을 찾은 키아라 루빅이 양극화와 빈곤 문제를 자선이 아닌 기업 활동으로 해결하려고 시작했다. 키아라 루빅은 기업을 “공공선을 실천하는 주체”로 정의했다. 이윤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공동체를 생각하는 시민적 덕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 점에서 EoC도 수도원 시대 때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시민 경제의 전통 위에 굳건히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EoC가 주목하는 것은 ‘관계 재화’다. 키아라는 기업 이윤의 3분의 1은 기업에 재투자하고 나머지는 ‘주는 문화’에 쓰라고 말했다. 바로 이 부분이 관계 재화를 만들어 내려는 투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EoC가 관계 재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의 행복이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서 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EoC의 권위자 루이지노 부르니 교수는 관계 재화를 “함께할 때 배가 되는 만족감”으로 쉽게 풀이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일할 때 느끼는 즐거움, 사랑하는 사람과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행복감 등이 여기에 속한다. 따라서 EoC 기업의 목표는 공동체 속에서 관계 재화를 풍성하게 생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EoC 기업인 대전 성심당을 보자. 성심당의 목표는 이윤 창출이나 기업 자체의 성장이 아니다. 성심당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러브콜을 사양하고 대전에서만 영업한다. 대전이란 지역 공동체에 뿌리내려 관계 재화를 풍성하게 만들려는 이유에서다.

 

1956년 창업할 때부터 날마다 해 온 ‘빵 나눔’을 현재까지 실천하고 있는 것도 지역 사회에 전통 깊은 ‘관계 자산’으로 이미 자리 잡았다. 대전 시민은 오래전부터 “성심당 덕분에 대전에 굶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해 왔고, 나눔의 규모 또한 다달이 3000만 원어치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2000년대 초 EoC 기업이 되기로 선언한 뒤에는 ‘투명 경영’을 통해 회사와 직원 사이에 신뢰를 쌓았고, 거래처와도 현금 결제를 정착시켜 상생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대전시와도 2016년 ‘대전 홍보와 마케팅 업무 협약’을 맺어 도시 홍보에 호흡을 맞추고 있다. 2017년 9월에는 대전시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전컨벤션센터(DCC)에 분점을 열었고, 상대적으로 침체하였던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심당은 지역 예술인과 학계, 그리고 지역의 다른 사회적 기업들과도 의미 있는 관계를 맺어 나가고 있다. ‘창립 60주년’ 같은 성심당의 주요 프로젝트에 지역 예술인과 마을 기업들을 두루 참여시켰고, 또 ‘대흥동성당 100주년 기념사업’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지역 학자들과 전문가들의 활동을 측면 지원했다. 성심당은 대전을 상징하는 기업이면서 동시에 대전 시민과 단체들과 다양한 경로와 형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EoC 기업이라는 정체성은 키아라 루빅이 직접 추천한 성심당의 사훈에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 12,17 참조).

 

 

그리스도인의 선택

 

21세기 들어 금융 산업이 실패하고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자본주의의 한계가 명확해지고 있다. 동시에 가톨릭권에서 천 년 넘게 이어져온 시민 경제의 전통이 ‘사회적 경제’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사실 사회적 경제를 들여다보며 가톨릭의 수도원 전통을 떠올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가톨릭의 사회 교리가 시민 경제 전통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시민 경제의 전통은 오늘날 ‘모두를 위한 경제’(EoC)로 구체화하고 있다. 더구나 이 운동이 관념의 영역이나 머나먼 해외 사례에 머물지 않고 대전 성심당이라는 매우 가깝고 구체적인 사례로 우리 곁에 ‘실현’되고 있다. 이윤 추구에 매몰되지 않고 공동체와 깊은 관계를 맺으며 함께 성장하고 함께 행복을 키우는 경제 활동이 현실 속에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성공적일 수 있음을 성심당이 하루하루 입증하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심당은 EoC를 향한 초대장일지도 모른다. 오늘부터라도 저마다 놓인 상황과 자리에서 이기심이 아니라 공공선을 실천하는 EoC 경제 활동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 김태훈 - 대학에서 조경과 문화 정책을 전공하고 경남도민일보 문화부 기자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음악산업팀장을 거쳐 현재 지역스토리텔링연구소에서 강연과 글쓰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 「시민을 위한 도시 스토리텔링」, 「지역 공동체와 미디어」 등을 썼다.

 

[경향잡지, 2018년 9월호,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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