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강론자료

2016-04-03.....부활 제2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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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6-04-02 ㅣ No.2025

 

부활 제2주일 (다해)

사도 5,12-16             묵시록 1,9-13.17-19 요          20,19-31

2016. 4. 3. 이태원

주제 : 예수님이 평화를 빌어주시는 까닭(!)

오늘은 부활대축일로부터 8일째 되는 날, 부활팔일축제기간의 주일이며, 부활대축일의 기쁨이 오늘까지 지속된다는 의미로, 부활대축일과 같은 품격으로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제자들과 3년을 함께 사셨습니다. 그렇게 지낸 끝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을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부활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고, 가능할 거라고 예상하지도 않은 놀라운 일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할 일로 사람은 감동하지 않고, 그런 일들을 경험한다고 해서 삶이 변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164, 이 시간에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듣는다고 해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거나 그 내용대로 실현할 수 있는 일에 함께 나서지 않는다면 바꿀 방법은 없겠지만,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평화가 우리와 함께 있기를 비는 예수님의 말씀을 세 번이나 들었습니다.

 

세 번씩이나 강조한 그 말씀을 여러분은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평화는 우리의 시대에도 필요할까요? 그렇다면 그 평화를 이루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혹시라도 내가 이미 평화의 한 가운데 살고 있으니 나에게 그 말씀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거나, 우리가 지레 겁을 먹고 평화가 필요하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이라고 말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는 것일까요?

 

다음주간, 수요일에는 우리나라에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거에서 투표하시겠습니까? 제가 하는 이 질문에 여러분이 대답하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은 없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선거에 관한 기사에 안타까운 내용이 있었습니다. 3년 전에 대통령선거에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에게 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왜 투표를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어, 이번에는 투표를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관련된 기사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3년 전에 내가 대통령후보로 누구를 선택하든, 내 삶이 달라질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해서 투표하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이번에도 같은 판단이라는 기사였습니다. 더더구나 이번에는 국회의원을 뽑는 일인데, 그가 누군지,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말에 관심도 없고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살지 말지도 모르는데, 내가 투표하는 일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겠느냐는 젊은이들의 인터뷰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대하면서 서글픈 생각과 함께, 사람들이 그렇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일을 세상의 정치판에서는 휴일로 만들면서까지 왜 투표하라고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나 일꾼을 선택하는 때와 상황이 되면, 우리나라에는 늘 반복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북한의 위협이 점점 더 커져간다는 내용을 텔레비전뉴스로 듣는 것입니다. 방송의 내용만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세상유일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이고, 우리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바로 그렇게 위협이 있는 불안한 곳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정치에서 권력을 쥔 사람은 자기 목숨이나 권리를 보존하는데 사용할 총이나 무기를 개인적으로 가져도 좋다고 허락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총이나 무기를 개인적으로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자유주의의 선진국가라고 하는 미국보다 불안하게 살고 있을까요? 우리들의 귀에 들려오는 이론과 현실이 아주 많이 다른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현실은 방송에서 듣는 것만큼 위험하지는 않다는 얘기일 것이고, 우리가 선거를 할 때마다 듣는 북한의 위협얘기는 실제로 근거가 없다는 것이며, 그 얘기는 또 다른 편의 의도적인 목적이 바탕에 있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세상의 삶에 필요한 것은 평화(平和)라고 생각하는 때에, 우리는 평화를 빌어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제자들이 살던 세상은 어떤 것이었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늘날의 우리가 겪는 것과 같은 세상에서 필요한 것으로 말하는 평화에 대한 얘기를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평화라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시대나 우리가 사는 지금이나 같겠지만, 그것을 대하는 자세는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자세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도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를 빌어주는 것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그 일을 두려워한 것일까요? 아니면 스승님을 죽음으로 몰았던 사람들이 한 번 더 자기의 칼날을 휘두를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해서 평화를 잃어버린 것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우리가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상황을 넘는 용기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자비의 희년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세상에 오는 선물이라고 하지만, 오늘 사도행전독서에서 들은 내용처럼, 내가 몸을 움직여서 하느님의 축복을 청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주는 일에서 힘을 얻어 내가 몸을 움직이고 그 축복된 일에 참여하려고 해야만 하느님의 자비는 선물이 되어 나의 삶에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축복을 베풀어주시려고 해도,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나무 뒤에 숨어서 하느님과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하느님에게서 아담과 하와가 얻어입은 가죽옷은 자비가 실현된 것이 아닐 것이고, 그러한 행동을 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 생기게 하는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내 삶에 실현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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